파문의 시간
서문파문의 시간2018. 9. 1.
구름의 흐름, 새의 몸짓, 물결의 파문, 빛살의 파장, 숲의 떨림과 같은 자연의 이미지들은 박철호 작가의 작업에서 추상적 모습으로 드러난다. 작품 속 이미지들은 구체적인 어떤 대상을 지시하지 않지만, 무심히 찍은 점과 그은 선들이 모여, 관객의 시선을 통해 각각의 이미지들로 재구성되어 나타난다. 아마천linen 위에 그려진 점과 선들은 물감과 물의 농도에 따라 번지기도 하고 선명해지기도 한다. 비슷하지만 다른 형태의 반복된 패턴들은 모양이나 크기, 간격, 농도 등 무엇 하나 같은 구석이 없다. 이는 주기적이지만 결코 같지 않게 순환되는 자연의 구조를 은유적으로 보여주며, 이렇게 드러나는 형상을 통해 작가는 스스로의 삶과 예술을 반영한다.
박철호 작가의 작업은 보링거Wilhelm Worringer가 『추상과 감정이입』에서 ‘추상충동’을 들어 말했듯이 자연에 대한 경외심에서 비롯한다. 격동의 시기라 불리는 7·80년대에 학창시절을 보낸 그가 느끼던 사회분위기는 세계에 대한 불안감과 불신으로 가득했다. 때문에 그가 거대한 자연의 숭고적 모습에서 매력을 느꼈던 것은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많은 작가들이 그러하듯 박철호 작가 또한 마찬가지로 처음부터 ‘자연’이라는 주제를 설정하고 작업을 한 것은 아니다. 그저 ‘예술이란 무엇인가’, ‘예술가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와 같은 예술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을 좇아가며 남긴 족적들에서 ‘자연’이라는 공통점을 발견했던 것이다. 청년기라고 할 수 있는 시기의 작업이었던 〈새Bird〉, 〈잎Leaf〉, 〈꽃Flower〉, 〈벌집Hive〉, 〈숲Forest〉 이라는 자연과 관련된 주제들은 이에 대한 방증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주제들은 자연스레 자연의 생성과 소멸, 순간과 영원, 절망과 희망과 같은 순환적 이야기로 확장되었다.
개별적인 주제들이 〈순환Circulation〉이라는 통합적 주제로 이행된 것처럼 박철호 작가의 작업 방식 또한 변화되었다. 박철호 작가는 미술을 접하기 시작한 대학시절부터 최근까지 줄곧 ‘판화’라는 매체를 다뤄왔다. 때문에 판화는 그에게 있어 중요한 요소 가운데 하나이다. 판화는 그 특성상 결과물이 우연성에 기인하기보다는 세밀한 계획을 통해 예측되어진 결과물을 뽑아내는 작업이다. 쉽게 말해 결과물 자체가 처음부터 작가의 예상범주 안에 있는 것이다. 이처럼 치밀한 공정을 통해 만들어낸 작업들에 어느 순간 우연적 요소들이 더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순환〉이라는 작업을 기점으로 그의 작업은 더욱 자유로운 회화로 변모했다. 물론 그가 다른 매체를 다루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오랜 기간 구축해온 자신의 예술을 벗어나, 새로운 시도를 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보여주는 실험적 태도는 꾸준한 작업과 냉철한 자기반성을 통해 이뤄질 수 있었을 것이다.
이번 시안미술관에서의 전시 《파문의 시간》은 그에게 있어 또 한 번의 실험이자 시도이다. 청년기부터 그는 〈순환〉이라는 제목처럼 수행하듯, 매일같이 같은 시간에 반복적으로 작업해왔다. 그동안의 작업이 외부의 사건이나 상황들에 영감을 받아 작업해왔다면, 이번 전시는 그러한 반복적인 작업을 통해 생긴 내면의 파문을 그려내는 것이다. 박철호 작가는 “작가는 어떤 믿음을 갖고 자신을 성찰해가면서 마치 농부처럼 매일매일 밭을 일구는 태도가 중요하다.”라고 말한다. 이어 “나는 아직 성장하고 있는 작가”라고 이야기한다. 작가의 말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러한 그의 예술에 대한 태도는 끊임없는 자기성찰에서 비롯됨을 확인할 수 있다. 그렇기에 《파문의 시간》은 작가 박철호의 변화되고 있는 작업을 보임과 동시에 앞으로의 예술적 실험과 시도에 있어 커다란 파문임을 예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