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fore Form-독립된 선험들

서문Before Form-독립된 선험들2025. 8. 21.

‘형식(form)’이라는 단어는 외형이나 정해진 틀을 가리키는 일상적인 개념처럼 여겨지지만 미술의 역사에서 형식은 작품의 본질을 규정하는 핵심 개념으로 자리해왔습니다. 특히 20세기 중반, 예술의 자율성과 순수성을 추구하던 시기에는 조형적 요소 그 자체가 예술성을 판별하는 절대적인 기준으로 작용했기 때문입니다. 그린버그를 필두로 한 형식주의 이론은 색채, 구도, 재료와 같은 조형 언어를 예술 고유의 영역으로 확고히 정립하였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정보의 파편화가 가속화된 소비 문화 속에서 ‘완성된 형식’이라는 의미는 점차 퇴색하고 있습니다. 예술은 ‘감정’, ‘맥락’, ‘서사’와 같은 외부 요소들을 적극적으로 포용하며 끊임없이 해체되고 재구성되는 일시적인 결과에 가까워졌기 때문입니다. 이제 동시대 미술에 있어 형식은 무엇을 어떻게 보여주는가라는 질문을 넘어, 그 형식이 탄생하기까지의 과정과 조건들을 함께 살펴보아야 하는 대상이 되었습니다.

그렇다고 이번 전시가 전통적인 형식의 구조를 해체하거나 부정하려는 시도는 아닙니다. 오히려 형식을 성립시키는 내적 조건들에 주목하고자 합니다. 그래서 《Before Form: 독립된 선험들》은 예술이라는 형식이 모습을 갖추기 전부터 이미 작동하고 있는 어떠한 경험과 감정적 동기, 언어로 명명되기 이전의 태도, 지극히 사적인 충동을 전시장에 배치합니다. 여기서 ‘선험(priori)’이라는 단어는 칸트가 말하는 보편적 경험 이전의 인식 구조와는 다른 의미로, 작가 개인의 내면에서 아주 먼저 일어난 감정의 단위, 판단이 생기기 이전의 원초적인 상태를 의미합니다. 이는 무언가를 표현하고 싶다는 충동, 다른 것으로는 해소할 수 없는 불편함, 반복해서 떠오르는 장면과 같은 것들을 지시합니다. 그래서 이번 전시는 바로 그 시작 이전의 상태, 예술이라는 형식으로 명명되기 전의 경험과 사유를 드러내고자 합니다.

이러한 주제를 드러내기 위한 전략으로 전시는 오픈스튜디오의 형식을 차용하면서도 전통적인 전시 방식을 병치하는 구조를 취합니다. 일반적인 오픈스튜디오가 작가의 창작 환경을 공개하는 것에 초점을 맞춘다면 《Before Form: 독립된 선험들》은 작가들의 사적인 공간인 작업실을 감정과 사유가 누적되는 공간으로 변모시킵니다. 다시 말해 작가들이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공간에서 태도가 결정되지 않은 채 부유하는 사유의 지층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작업실들 사이에 위치한 전시 공간은 11월에 이어질 본 전시의 구조를 미리 보여주는 ‘프리뷰(preview)’의 역할을 수행합니다. 즉, 이 전시는 완성된 결과만을 나열하는 방식이 아니라 진행 중인 상태의 구성과 각자의 시작점이 된 사유를 함께 제시함으로써 예술적 형식의 과정을 서사화하는 것입니다.

전시 구조의 특성상 작가들의 작품이 아직은 진행 중인 상태이기 때문에 어떤 경험은 감정에 머물러 있고 어떤 선택은 여전히 보류된 채 남아 있으며 어디에 어떻게 도달할지는 결정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미완의 상태는 불확실함이라기보다는 태도와 사유가 여전히 움직이고 있다는 징후로 읽혀야 합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작가에게 제작 과정을 외부에 드러낸다는 것은 결코 가볍지 않은 결정입니다. 사유가 미처 정리되지 않았거나 태도가 확정되지 않은 시점은 때로 불완전한 상태로 오해되거나 곡해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번 전시는 더욱 조심스럽고 민감한 위치에 놓여 있습니다. 그럼에도 이 조심스러움 자체가 이번 전시를 구성하는 가장 중요한 조건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은 완성된 작업이 아닌, 결정되지 않은 상태를 공유하는 일이 작가가 작품을 대면하는 방식 자체를 형식으로 구조화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Before Form: 독립된 선험들》은 이러한 민감한 사유의 틈을 그대로 드러냄으로써 형식 이전의 상태가 하나의 전시 형식으로 작동할 수 있음을 시도합니다.

케이킴

케이킴 작가는 대중문화 속에서 오랜 시간 소비된 캐릭터나 역사·문화적으로 각인된 인물들을 이미지로 소환합니다. 세대를 거쳐 반복적으로 소비된 캐릭터, 이순신 장군과 같이 한국인의 집단 기억 속에 확고히 자리한 인물들이 그 대상입니다. 이러한 선택은 유명한 소재를 차용하여 그 서사를 소환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작가가 자신의 시각 언어를 고유한 서사에 입혀 결합하는 방식이라 할 수 있습니다. 작가는 우리에게 이미 각인된 형상(상징)에서 출발하여 그것을 다시 구성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경험과 감각을 더합니다.

이러한 작업은 대중문화 혹은 역사적 서사의 접점을 새롭게 만드는 시도로 읽힐 수 있습니다. 관객은 누구나 알고 있는 익숙한 이미지에서 출발하지만 작가의 화면 속에서 그 익숙함은 또다른 서사로 변주됩니다. 풀어내자면 과거 아이들에게 소비되던 캐릭터가 오늘에 와서는 세대를 넘어 축적된 정서적 기억의 표상으로 작동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편, 이순신 장군은 역사적 위인의 초상에서 벗어나 현대적 시각 체계 안에서 다시 인식되는 캐릭터로 자리합니다. 작가는 이처럼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시각 요소와 집단 기억의 상징을 병치하여, 과거의 기억과 현재의 감각을 마주하게 합니다. 다시 말해 케이킴 작가는 집단 기억을 개인적 시선으로 재편집하는 방식을 통해 새로운 서사의 구축을 시도합니다. 이미지가 어떻게 완성되었는가보다 더 중요한 지점은 이 이미지들이 앞으로 어떤 방식으로 결합되고 변주될 수 있는지의 가능성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김진아

김진아 작가는 가족을 다람쥐 캐릭터로 의인화해 구미 곳곳의 장소를 하나의 장면으로 구현합니다. 작품 속에 등장하는 실제 지역의 장소들은 작가의 생활 반경에서 비롯된 것으로, 일상의 동선과 경험이 작업의 토대가 되는 것입니다. 각각의 장면은 독립적으로 존재하지만 동일한 캐릭터 구성과 설정이 작업 전체를 하나의 연속된 기록으로 묶습니다. 이를 통해 작가는 ‘가족–장소–기억’을 하나의 장면으로 응축하고 일상의 단편들이 회화적 서사로 연결되기 이전의 상태를 기록합니다.

작품 속 다람쥐 가족은 말풍선이나 대사 없이 회화적 장면만으로 이야기를 전달합니다. 배경이 바뀌더라도 반복 등장하는 캐릭터가 장면과 장면을 이어주며, 금오산의 숲길, 강변의 산책로, 시장 골목 등의 풍경이 자연스럽게 하나의 여정을 형성하게 됩니다. 이러한 배경은 지역성을 환기하는 시각적 장치로 작동하고, 각 장면의 반복과 변주는 개인의 삶 속에 스며든 지역의 시간성을 드러냅니다. 작가의 이야기는 가족의 서사를 사적 기록에 머물게 하지 않습니다. 지역의 장소들이 가족을 넘어 시민이라는 상징을 담은 캐릭터와 결합하며 새로운 의미망을 형성하는 시도라 할 수 있습니다. 이는 사적 기억과 공적 풍경이 만나는 지점을 제시합니다. 익숙한 장소를 회화로 옮기는 과정이 어쩌면 ‘장소의 기록’이자, 장소를 통해 자신의 삶을 증언하는 방식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작가는 어떤 장면을 완성된, 혹은 완결된 이야기로 제시하기보다는 서로 다른 장면들이 유기적으로 이어지는 구조를 선택함으로써, 예술의 개방성과 불확정성을 유지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김진아 작가는 가족이라는 가장 가까운 관계를 통해 지역의 풍경과 시간을 다시 쓰는, 즉 기록과 서사 사이에서 일상의 지도를 그려나가는 작업을 이어갑니다.

배태열

도시를 산책하는 것으로부터 배태열 작가의 작업은 시작됩니다. 작가는 GPS와 이동 기록, 걷는 동안 수집한 사물의 재조립을 통해 '이곳에 내가 있었음'을 흔적으로 남깁니다. 도시라는 거대한 조직 속에서 한 개인의 존재는 쉽게 희미해지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작가는 이를 거부하듯 매일 거리를 걸으며 자신의 위치를 확인하고 이동의 기록을 시각화합니다. 거대한 도시의 질서 속에서 끊임없이 방향을 설정하고 경로를 남기는 행위는 사라지지 않기 위한 의지이자 배태열 작가만의 방식으로 도시를 읽어내는 태도이자 실천일 것입니다.

작가에게 걷기는 한 지점에서 다른 지점으로의 이동이 아니라, 도시를 대상으로 한 관찰과 기록 그리고 이를 토대로 한 사유가 동시에 이루어지는 실천적 예술 행위가 됩니다. 하루를 정리하는 일기를 작성하듯 GPS 경로를 남기고, 길에서 만난 버려진 사물을 수집하여 해체하고 다시 조립하는 일련의 과정은 도시와의 관계를 다시 쓰는 방식입니다. 이렇게 수집된 사물은 원래 있던 장소의 좌표와 연결되어 ‘관계의 흔적’이 됩니다. 작가의 작업은 이처럼 물리적 좌표 위에 사회적, 그리고 정서적 맥락을 겹쳐놓는 방식으로 도시와 개인이 맺는 관계를 다층적으로 드러냅니다. 때문에 배태열 작가의 작품은 이동과 채집, 해체와 조립이라는 연속된 행위가 하나의 형식으로 구축됩니다. 작가에게 작품은 매일의 걷기를 수행처럼 반복하며 도시 속에 자신의 흔적을 새기는 일에 가깝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 반복되는 수행은 '습관'이 아니라 사라(잊혀)지는 것을 거부하고 관계 맺기를 지속하려는 생존의 방식일 것입니다. 그렇게 배태열 작가는 이 도시 속에서 스스로의 위치를 탐색하고 새기고자 하는 의지가 어떻게 형식으로 발현할 수 있는지를 실험합니다.

변예찬

변예찬 작가는 ‘위로’라는 정서를 작업의 중심에 두고 제작을 이어갑니다. 작가는 특정한 사건이나 사회적 주제를 직접적으로 다루기보다는 개인이 마주하는 감정을 이미지로 전환해 타인에게 전이될 수 있는 장면을 만듭니다. 작품에서 선택되는 모티프들은 모두 관계와 정서의 매개로 작동하며, 이러한 매개는 구체적 사물의 형태를 빌려 구축됩니다. 예를 들어 이번 전시에서 선보이는 <시약불견>은 ‘보고도 못 본 체함’이라는 의미를 작가의 표현으로 풀어낸 것입니다. 장시간 노출 촬영을 통해 인물과 사물의 윤곽이 흔들리고 겹쳐진 이미지는 존재가 명확히 드러나지 않은 채 시야 속에서 흐려지는 순간을 포착합니다. 이 이미지는 관계 속에서 중심이 되는 대상이 의도적으로 회피되거나 주변부로 밀려나는 상태를 은유합니다.

작가의 태도는 위로를 사적인 감정이나 특정 사건에 한정하지 않고, 그 가능성을 실험하는 데 있습니다. 이미지 제작 과정에서 그는 촬영, 합성, 변형 등 여러 방식의 시각적 실험을 병행하며, 이를 통해 관계의 층위를 해체하고 재배열하는 시도를 반복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실험은 단일한 정서가 아니라 복수의 해석과 관계를 허용하는 구조를 만들며, ‘위로’라는 주제를 다양한 시각적 언어로 번역합니다. 결국 변예찬의 작업은 감정의 표면을 직접적으로 묘사하기보다, 그 감정이 발현될 수 있는 장면과 조건을 조형적으로 탐구하는 과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병, 손, 그리고 다양한 이미지 실험들은 모두 이 과정의 일부로서 위로가 일방적인 감정 교류가 아니라 관계 속에서 형성되는 구조임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이는 감정이 머무는 방식과 그 전이의 가능성을 사유하는 시도가 됩니다.

석민경

석민경 작가는 자신을 상징하는 캐릭터 ‘밍크툰’을 중심으로 한 작업을 이어왔습니다. 밍크툰은 작가의 자전적 서사를 함축한 이미지로, 다른 캐릭터와의 관계나 위계 구조 속에서 그 위치를 유희적으로 재배치하며 존재감을 확장해왔습니다. 그러나 이번 전시에서 작가는 밍크툰의 세계를 한 걸음 비켜서, ‘죽음’이라는 주제를 향합니다. 이는 개인적 상실의 경험을 기반으로 하지만, 그 과정에서 밍크툰은 더 이상 중심이 아닌 잠재적 요소로만 남아있습니다.

이번 작품은 한 존재의 상실로부터 시작합니다. 그러나 이는 개인적 기록을 넘어, 삶과 죽음의 경계를 이미지로 재편하는 시도에 가깝습니다. 밍크툰이 과거 작업에서 유희적 재배치를 통해 자아와 세계의 관계를 탐색했다면, 이번 작업에서는 죽음을 매개로 인식의 구조를 다시 짜 맞춥니다. 작가는 죽음을 하나의 종결된 사건으로 규정하지 않고 기억이 굳어지기 전의 미결정적 상태로 제시합니다. 이미지는 죽음을 둘러싼 복합적인 감정을 담고 있습니다. 슬픔, 두려움, 해방감이 동시에 스며 있는 장면은 완전한 서사를 거부하는 구성 방식을 따릅니다. 여백과 분리된 구도를 통해 그 복합성을 드러냅니다. 이번 전시에서 석민경 작가는 밍크툰이라는 자전적 기호의 이전을 프리뷰의 형식으로 드러냅니다. 여백과 분리된 구도는 감정의 유동성을 강조하고, 이미지의 의미를 한 방향으로 고정하지 않습니다. 이를 통해 작가는 사건으로부터의 감정이 형식화되기 전의 상태를 시각적으로 포착합니다.

위정선

위정선 작가는 관계 속에서 드러나는 다양한 경계를 오랜 기간 연구해 왔습니다. 세대, 성별, 계층, 국가, 이념, 자아와 타자 간의 미묘한 간극은 작가가 작품에서 지속적으로 다뤄온 주제입니다. 작가의 작품에서 등장하는 토끼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서 차용한 모티프이자 현실과 환상의 문턱을 넘나드는 매개자입니다. 단순화된 외형과 정적인 표정, 그리고 ‘귀’와 ‘뿔’의 이중적 상징은 개방성과 방어성, 친밀함과 거리감을 동시에 품고 있습니다. 때문에 작품에서 토끼는 경계를 넘나드는 주체로 기능하며 감정과 관계의 변화를 서사적으로 이끌어갑니다. 반면, 코르크 조각은 경계의 개념을 물리적이면서도 상징적으로 응축합니다. 코르크 마개는 내부와 외부를 나누는 물리적 경계 장치이자 절제와 억제를 상징하는데, 그러나 그것이 제거되는 순간, 감각적이고 비이성적인 세계가 열리게 됩니다. 이 위에 코르크 마개와 거의 같은 사이즈의 토끼 조각이 올려지면서 억제의 상징과 환상의 매개자가 한 덩어리처럼 결합하게 됩니다. 이제 토끼는 더 이상 그림 속 이야기의 등장인물이 아니라 질서와 상상, 절제와 욕망이 맞닿는 경계의 긴장을 압축한 입체적 형상으로 기능하게 됩니다.

회화와 조각은 경계를 서로 다른 방식에서 경계의 성질을 드러냅니다. 회화는 경계가 형성되기 전, 관계와 상황이 변화하는 과정을 포착하며 서로 다른 위치들이 맞닿는 순간을 드러내는 반면, 코르크 조각은 이미 내부와 외부를 가르는 역할을 지닌 사물을 가져와 그 상징성과 기능을 조형의 일부로 편입시킵니다. 작가에게 경계는 단절이 아니라 전환과 연결이 이루어지는 잠재적 공간으로 작동합니다. 작가는 경계를 흐리게 만들기보다는 그것을 정확히 인식하고 다루는 태도를 취합니다. 어쩌면 이러한 방식이 관계 속에서 새로운 이해의 가능성을 여는 시도이자, 삶의 다양한 상황에서 마주하는 경계를 안전하게 넘나들 수 있게 하는 실천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화영

이화영 작가는 섬유, 실, 시멘트, 철망 등 서로 다른 물성을 지닌 재료를 엮어 내면의 기억과 정서를 시각화해왔습니다. 실을 잇고 매듭짓는 행위는 상처와 보호의 표면을 드러내기도 하고 무너진 것을 다시 세워 올려 삶의 구조를 새롭게 직조하는 은유로 작동하기도 합니다. 작가에게 있어 이러한 재료의 결합은 조형적 실험이자 서로 다른 경험의 감정을 하나의 이미지 안에 녹여내어 작가의 작업관을 확장하는 방식이라 할 수 있습니다. 지극히 사적이지만 보편적이라고도 할 수 있는 경험에서 이화영 작가의 예술적 사유는 시작됩니다. 때문에 작가의 작품은 평범하면서도 아무것도 아니라고 여겼던 기억과 경험을 통해 사회의 단면과 이면을 지시하고 있습니다.

이번 전시에서는 우레탄, 아크릴, 폴리에스터, 비닐 등을 사용하여 인물의 신체를 콜라주하고 그 위에 우레탄 전사층을 덮어 마감한 신작을 선보입니다. 화면에는 구르고, 부딪히고, 떨어지는 누드 장면들이 연속적으로 등장하지만 구체적 서사나 배경은 배제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이미지와 함께 재료의 물성, 표면의 질감, 투명도와 불투명도가 교차하는 방식으로 시각적 긴장과 심리적 압축을 만들어냅니다. 이는 작가가 지속적으로 다뤄온 ‘내면의 균형’이라는 주제를 새로운 조형적 언어로 확장한 시도입니다. 이화영 작가의 작업은 다양한 재료의 실험과 심리적 사유를 이웃시켜 인간 내면의 불안정한 상태를 지시할 수 있도록 구성합니다.

최규란

최규란 작가의 작업은 ‘붙이거나 떼어내기’, ‘그리거나 지우기’, ‘만들거나 해체하기’라는 상반된 행위를 반복하며 생성과 소멸의 경계에서 사유를 확장해 왔습니다. '유한하게 사라질 운명을 지닌 대상에 왜 인간이 매혹되는가'라는 질문은 일상의 사물에서 발견한 재개발지 풍경, 해체된 건축물, 자연물 등을 재조직해 화면에 배치하는 등의 조형 언어로 질문됩니다. 찢고 붙이는 방식으로 화면을 재조직하며 구축된 '흔적'은 완전한 지움이 아닌, 이전 상태의 기억을 품은 채 다음 형태로 이행합니다.

최근의 회화 작업으로 이어지는 문 시리즈는 이러한 사유를 지역의 장소적 사유로 확장합니다. 작품에서의 ‘문’은 건축물의 일부로서 주변과 맥락을 공유하지 않습니다. 되려 배경과 분리된 채 오로지 그 자체로만 존재합니다. 주변 환경이 제거된 자리에는 문이 품고 있는 질감과 흔적, 색채의 변이만이 남아 그 장소가 지닌 기억을 사유하게 합니다. 페인트가 벗겨진 결, 금이 간 패널과 같은 디테일한 표현은 사용과 방치, 변형과 잔존의 시간을 압축한 흔적들임을 알 수 있습니다. 작가는 이 표면을 회화로 옮기며 문이 가진 물리적 기능보다 그것이 증언하고 있는 시간성과 존재감을 전면화합니다. 이 과정에서 회화는 사진이나 영상이 담아낼 수 없는 경험의 시간을 구현합니다. 카메라가 포착하는 것은 한 순간의 단편이지만 작가의 붓질은 같은 대상을 수차례 마주하면서 그 변화를 인식한 시간을 겹겹이 화면에 새겨 넣는 행위라 할 수 있습니다. 색과 형태의 미묘한 차이, 표면에 남은 수많은 흔적들을 작가만의 색으로 다시 그려내는 것은 이미지를 ‘기록’하는 것을 넘어 장기간에 걸쳐 ‘경험’한 장소를 회화적으로 옮겨내는 과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라짐을 전제로 하면서도 여전히 남아 있는 흔적으로부터 오는 질문은 이처럼 그리기라는 방식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최대광

최대광 작가의 작업은 일상의 오브제를 해체하고 재조합하여, 우리가 당연하게 받아들여온 가치와 판단의 구조를 낯설게 전환합니다. 과일, 쓰레기봉투, 병풍 등 서로 다른 대상들은 작가의 손에서 비유와 알레고리, 상징의 언어로 재편됩니다. 이 과정에서 사물은 본래의 기능이나 의미로부터 이탈하고 그 간극에서 인식의 오류와 가치 체계의 불안정성이 드러나게 됩니다. 작가가 선택하는 소재는 보편적으로 익숙한 것이지만 그것을 다루는 방식은 단호히 실험적입니다. 예를 들어 과일에 탯줄을 연결한 작업은 외형의 차이를 근거로 한 배제와 혐오를 비판하면서도 모든 생명의 기원이 다르지않음을 은유하고 있습니다. 쓰레기봉투 작업은 ‘무엇을 담고 버리는가’라는 질문을 통해 가치의 형성과 소멸을 추적하는가 하면, 병풍 작업에서는 희·비, 생·사, 빈·부를 나누는 경계의 상징으로서 시간과 공간을 재단하는 방식을 시각화하기도 합니다. 또 흑백 톤 속에서 옷을 벗고 몸을 닦는 행위를 담아낸 영상 작업에서는 지워낼 수 없는 흔적과의 대면, 인식된 것의 거부와 불가능성을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이는 작가가 일상의 사물뿐 아니라 신체와 행위를 매개로도 가치 체계의 불안정성과 인간 존재의 모순을 드러내려 한다는 것을 읽을 수 있습니다.

이러한 시도들은 형식 이전의 상태에서 출발합니다. 작가는 개념과 태도가 굳어지기 전, 혹은 굳어진 그것의 이면을 응시합니다. 즉 사물이 지닌 물리적 형식보다 그것이 전환되는 과정 그리고 그 과정에서 드러나는 인식의 균열에 주목하는 것입니다. 대상이 지니고 있는 고정된 가치라는 상징성의 이면에서 잠재적 의미들을 발굴하려는 실험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최대광 작가의 작품은 서술이 아닌 질문의 형식을 따릅니다. 반복되는 시간과 경계 지어진 공간 속에서, 죽음과 삶, 수용과 배제, 실재와 착각이 어떻게 공존하는지를 묻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질문은 특정한 해답에 닿기보다, 끝없이 다른 가능성을 향해 확장하는 사유로 작동합니다.

최선아

최선아 작가의 작품은 자신의 시간을 되돌아보는 과정으로부터 시작합니다. 그 시간은 일종의 자책과 반성 그리고 작은 소망의 기도로 채워지기도 합니다. 육아와 생활 속에서 자신을 잃어버린 것만 같은 감각, 그러나 이 지나간 시간들이 무의미하게 흘러간 것이 아니라, 켜켜이 쌓여 무언가를 이루리라는 소망이 화면 속에 녹아듭니다. 그렇기에 작가에게 산은 시간이 축적된 형상이며 바다는 고요와 평안의 시간들을 담아내는 장소가 됩니다. 달, 열매, 꽃, 구름, 물고기와 같은 이미지들은 작가의 여러 서사를 대변하는 사유의 기호로 배치됩니다. 그림은 장지를 바탕으로, 색을 쌓아 올리고 긁어내거나 닦아내는 과정을 거쳐 완성됩니다. 이 느린 공정 방식은 시간을 머금은 회화적 언어가 됩니다. 색의 중첩, 그림의 표면 위에 비치는 색의 깊이는 오랜 시간 축적된 감정과 생각이 한 화면에 스며든 결과가 됩니다.

작가의 회화는 치유라는 회화의 오래된 기능을 다시 환기하게 합니다. 그리기는 상처를 덮거나 감정을 가라앉히는 수단이자, 작고 사적인 소망을 시각화하는 방법이 되는 것입니다. 화면 속 풍경과 상징들은 외부의 사건을 재현하기보다, 마음이 가는 대로 따라 걸으며 형성된 풍경이자 서사가 됩니다. 그렇게 만들어진 이미지는 작가 자신의 내면을 다독이는 동시에, 그것을 바라보는 이에게도 같은 이야기를 전합니다. 어쩌면 최선아 작가의 작품은 물감을 '칠하는' 방식이 아니라 '스미는' 것과 같이 작동하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작가 스스로를 되돌아 보고 사유한 긴 시간만큼, 작품의 이미지 또한 시간의 겹을 다층적으로 드러냅니다.

최소정

최소정 작가에게 펜싱은 몸속 깊이 축적된 궤적의 기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이번 작업에서 선택한 동판화는 작가의 신체가 기억하는 움직임과 현재의 사유를 하나의 화면 안에서 결합하기 위한 매체적 장치라 할 수 있습니다. 작품은 10×10cm의 정사각형 이미지와 100×16cm의 직사각형 액자로 구성됩니다. 이 두 형식의 대비는 작가의 삶과 작업이 교차하는 구조를 형성합니다. 이미지(정사각형)의 정적 안정과 피스트(직사각형)의 역동성은, 부상으로 인한 멈춤과 새로운 길을 향한 전환과 같은 상충되는 맥락을 하나의 화면에 구성합니다. 이미지에 새겨진 선들은 경계와 구획, 방향성과 궤적, 연결과 단절을 은유하는 조형 언어로 작동합니다. 펜싱에서 선은 공격과 방어의 경로를 설정하고 두 인물 사이의 심리적 거리를 가르는 표식이 됩니다. 반면 판화에서는 동판을 칼로 긁어내는 힘과 속도가 그대로 각인되어, 한 번의 선택이 지워지지 않는 흔적으로 남습니다.

이번 작업의 선들은 Attaque directe(직진), Feinte(공격), Attaque contre-fer(회전), Parade(방어)라는 네 가지 궤적에서 출발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기술의 도식이 아니라, 작가가 지나온 삶의 압축이라 해야할 것 입니다. 직진은 주저 없는 결단의 순간이고, 공격은 돌파를 시도하는 의지이며, 회전은 방향을 바꾸는 선택의 힘이고, 방어는 자신을 지키기 위한 마지막 경계입니다. 이러한 궤적들은 삶이라는 지도 위에 다층적인 시간과 경험을 압축한 경로로 그려지는 것입니다. 최소정 작가의 선은 자신의 과거나 펜싱이라는 스포츠의 흔적이 아니라, 멈춤과 전진, 단절과 연결 사이를 오가며 자신을 다시 세우는 과정에서 발견한 또 하나의 자화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아카이브룸은 형식으로 구축되기 이전의 흔적들을 모아놓은 공간입니다. 이 곳에는 작가들이 작업 과정에서 마주한 사건, 일상에서 획득한 사소한 기호 그리고 사유의 출발점이 된 파편적 경험들이 오브제의 형태로 자리합니다. 이들은 완성된 결과물로서의 작품이 아니라 작품으로의 가능성을 견지하게 하는 내적 잠재력과 미결의 상태를 드러내는 표지들인 것입니다.

따라서 이 공간은 과정의 기록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다. 보존을 목적으로 하는 아카이브와는 달리, 여기서의 아카이브는 불완전하고 임시적이며, 언제든 다른 형식으로 옮겨갈 수 있는 유동적인 상태를 전제로 합니다. 작가의 언어가 작품으로 전환되기 이전에 잠시 머물던 자리, 혹은 사유의 궤적을 시각적으로 드러내는 흔적들이 배열되어 있습니다.

아카이브룸은 형식 이전의 사유를 공유하는 공간입니다. 여기 놓인 사물과 기록을 앞의 전시 공간에서 마주한 작품들의 기호와 이웃시켜 본다면 형식화되어 완성된 작품이, 그리고 예술이, 선험적으로 존재했던 수많은 가능성을 함께 사유할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