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곤대나이

평론박동수2026. 7. 3.

받은 힘을 막지 않는다. 흘려보내지도 않는다. 방향만 틀어 고스란히 되돌려준다. 무협지 속 무림이라는 세계에는 "건곤대나이"라는 신공이 있다. 상대가 천 근의 힘으로 밀고 들어오면, 그 천 근을 손목 한 번으로 거두어 온 길로 되돌려 보내는 것이다. 작은 힘으로 큰 힘을 받아내고, 날아든 것을 그대로 상대에게 돌려주는 무공이다. 보통 평생을 두고 익혀야 하는 다른 무공들에 반해, 이 신공의 묘리는 한 줄로 설명된다. '하늘과 땅(건곤, 乾坤)을 한 손 안에서 뒤집을 것.' 즉, 위에 있던 것을 아래로 내려앉히고, 아래 있던 것을 위로 솟구치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뿐이다. 내공만 갖추었다면 누구든 펼칠 수 있을 만큼 간단하다고 한다. 천지가 뒤집히면 크고 작음의 위계도 함께 무너지는 법. 천 근이 손바닥 위에 서고, 한 줌의 힘이 천 근을 떠안는다는데, 본래 무엇이 크고 무엇이 작았는지 묻는 일이 무슨 의미를 가지겠는가. 애초에 크거나 작음을 견줄 대상이 존재하지도 않았는데 말이다.

하늘과 땅이 맞닿은 공간 속에, 검은 덩어리들이 놓여 있다. 그 덩어리, 아니 육면체 하나만으로도 하나의 사물, 혹은 하나의 세계라 할 수 있겠다. 그 하나가 오롯이 설 수 있으니까. 그러나 옆에 또 하나가 놓이고 다시 또 하나가 더해지면서, 그것들은 하늘의 그림자처럼 바닥을 메워 나간다. 더안미술관 1층은 그렇게 200여 개의 육면체로 드리워져 있다. 그러나 고르게 깔려 있는 것도 아니다. 한쪽에 빽빽이 모였다가 앞으로 올수록 성글어지며 흩어진다. 너른 잎몸에서 잎끝으로 가늘어지듯, 한 장의 잎처럼 보인다. 그러니 육면체 하나는 잎맥의 한 마디이면서 잎 전체이고, 잎은 다시 휜 나무 기둥이 솟은 방 안에 놓인 한 점이 되는 것이라 할 수 있겠다. 어디서 끊어도 부분이 전체이고 전체가 부분인 셈이다. 하나를 떼어 내도 온전한 하나이고, 모두를 합쳐도 다시 온전한 하나인 것이다.

하늘의 그림자처럼 드리운 그 검은 것들이, 어쩌면 비어 있음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닐까. 빛을 기준으로 삼으면 검정은 빛이 닿지 않는 곳에 있다. 그래서 존재하지 않는 색이라 한다. 아무것도 남지 않은 끝과 같이 말이다. 그러나 그것은 빛의 편에서 본 검정일 뿐이다. 먹은 이미 다르게 알고 있다. 단 한 가지 색으로 짙음과 옅음을, 무거움과 가벼움을 전부 길어 올리기 때문이다. 한 색 안에 모든 농담이 잠겨 있으니, 검정은 색이 빠져나간 끝이 아니라 모든 색이 아직 갈라지기 전에 함께 머무는 처음인 것이다. 옛어른들이 먹빛을 현색(玄色)이라 부른 까닭도 거기에 있다. 그저 어두운 색이 아니라, 모든 빛깔을 안에 품은 색이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먹이 한지에 스미는 그때부터 그 자국은 영영 남는다. 덧칠로 지울 수도, 긁어 되돌릴 수도 없다. 한 번 어긋나면 화면 전체가 어그러질 수밖에 없다. 말 그대로 주화입마에 빠지는 것이다. 게다가 먹은 두 번, 세 번 지난 길을 감추려 하지 않는다. 흘러내린 자리도, 겹쳐 지난 자리도 그대로 두는 것이 먹이 걸어온 길이다. 그러니 화면에 남는 것은 손이 지나간 시간의 순서라 할 수 있겠다. 덧칠로 앞의 시간을 덮어 매끄럽게 만드는 대신, 흘러간 그대로를 표면에 둔다. 검은 면 하나하나가, 되돌릴 수 없는 시간을 품은 채로 굳는 것이다.

이제 묘리는 다 펼쳐보았다. 부분과 전체가 서로를 바꾸고, 검정 하나가 모든 색을 떠안으며, 되돌릴 수 없는 시간이 그 안에 잠긴다는 것을 확인해 보았다. 건곤대나이라는 한 줄의 묘리가, 바닥을 메운 검은 덩어리들 위에 그대로 포개진다. 적어 놓고 보니 어려울 것이 없다. 물론 한 줄로 적혀있다고 해서 누구나 펼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같은 묘리도 그것을 오래 매만진 손에서야 비로소 풀려나오는 법이다. 박동수가 30여 년을 검은 화면 앞에서 보낸 사람이라는 사실은, 이 단순한 묘리가 어떻게 그의 손에 닿아 있는지를 짐작하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