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미래
서문어울아트센터2022. 10. 8.
오래된 미래 : NEO SKIN
1.
인류에게 있어 고전(classic, classical)은 커다란 자산이자, 모티브로써 예술을 한층 더 성장할 수 있게 하는 동력을 제공한다. 이러한 고전이 지니는 가치와 역할은 예술을 넘어 전통과 현대를 이어주는 교두보 역할을 함과 동시에 인류의 사회학적 기준점을 제시한다. 고전적인 작품들이 현대에 와서 때때로 구식이라고 지칭되기도 하지만, 인류의 역사에 있어 영속적으로 함께해 온 이유는 그 형태나 내러티브가 모범적이고 완전하였기 때문이다. 미술사적으로 고전을 표방하였던 르네상스나 신고전주의가 이에 대한 방증이겠다. 하지만 고전적인 작품들이 시대를 막론하고 수많은 예술가들의 모티브가 되기도 하였지만, 예술은 스스로를 답습을 하지 않으며 새로운 무엇인가를 찾아내고 그 시대를 드러내려는 기질을 지니기에, 고전은 같은 방식을 채택한다 하더라도 그 시기에 제작된 작품이어야만 제대로 된 가치를 품게 된다. 때문에 고전시기 예술(classical Greek art) 이후의 예술은 고전이라는 완전한 모티브를 이용하여 새로운 형식을 탐구하였고, 새로운 가치를 획득하고 모범이 되는 예술에 대하여 기꺼이 고전의 반열에 세우며 다음 세대에게 확장된 아이디어를 제공함으로써 고전이라는 수식어를 완성시킨다.
이와 같이 고전적이고 전통적 형식을 띤 예술의 잠재적 내러티브를 끌어내려는 고민은, 지금 이 시점에서 다시 수면위로 끌어올려 다각적으로 살펴보아야 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근래의 뜨거운 감자로 부상한 메타버스와 NFT를 비롯하여 각종 뉴미디어 작품들이 탐구적이고 실험적인 미술계를 점거하고 있는 이 시점에서, 많은 예술가들은 가상 및 온라인 작품의 예술성 확보와 자본과 기술에 밀려 전혀 감흥 없는 뉴미디어 작품의 문제에 대한 연구와 해결책을 찾는 것에 열중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와는 별개로 동시대의 더욱 많은 예술가들은 전통적 예술 형식을 따르는 작품이 가지는 미지의 가능성 또한 타진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현재 비엔날레와 같이 동시대를 대변하고 미술의 방향성을 제시하는 전시의 대부분은 설치 및 뉴미디어 형태의 작업들이 주를 이루고 있는데 반해, 평면성을 바탕으로 하는 작품은 대부분 아트페어나 갤러리 등에서 관객과 대면하게 된다. 이는 평면적 형태가 가장 전통적인 방식이기에 새로운 예술적 내러티브를 끌어내기 힘들다는 점과 가령 예술성을 차치한다고 하더라도 평면 작품이라는 이유로 상업적 의도를 내포하는 것이라고 비추어지기 때문일 것이다. 이렇게 평면적인 형태로 제작된 작품이 나름의 예술성을 담보하고 있더라도, 상업적 시선으로 인하여 그 포커스가 예술성에 제대로 맞춰지지 않는 경우가 종종 발생하는 것은 어쩌면 현재 호황기를 누리고 있는 미술시장의 영향일 수도 있겠다.
2.
햇빛이 비치는 곳에는 언제나 그늘이 있는 것과 같이, 호황을 맞은 미술시장의 이면에 자리한 불특정한 작품의 예술성이 탈락하고 있다. 이는 비단 사회적인 현상에서 비롯되는 것만이 아닌, 몇몇의 예술가들이 스스로의 작품을 상품화시키는 것에 주력을 두기도 하기 때문이다. 예술과 관련한 문제는 예술로써 해결하는 것처럼 이러한 과제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를 풀어내려 하는 전시가 《NEO SKIN》이다. 주지하듯이 전시를 주최하는 행복북구문화재단은 판매를 중점으로 하는 상업적 갤러리가 아닌, 공적이며 동시대 예술의 방향성을 제안하는 역할을 하는 기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전시는 평면성을 가진 작품이라는 골조를 기저에 세우고 기획되었는데, 그것은 앞서 서술한 바와 같이 평면적 작품이 가지는 예술적 가능성을 재탐색하기 위함일 것이다. 여기에 더해 그 잠재성을 탐색할 수 있는 여러 조건 중 하나로 매체적 표현기법을 채택하여 전시를 풀어내는데, 이는 평면성이 가지는 광범위한 영역을 보다 세부적으로 들여다 볼 수 있는 방법적 접근이 된다. 마지막으로 전시에서 드러내고 있는 내러티브는 예술이 지녀야할 동시대성을 어떻게 드러낼 것인가를 탐구한다. 다시 《NEO SKIN》展의 기획의도를 정리하자면, 인류 역사에 있어 가장 오래된 매체인 평면적 예술을 통해 동시대성을 탐구하고 미래의 예술이 지향할 방향성을 설계하는 것에 있다.
전시의 기획의도가 설정해둔 방향을 따라 전시장을 들어서면,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현대인에게 있어 가장 전통적이고도 친숙하지만, 익숙하지는 않은 ‘한지’와 ‘실’이라는 매체로 제작되어진 작품과 마주하게 된다. 즉 한지와 실(옷 따위의 직물이 아닌 온전한 실의 형태)은 한국인에게 심적으로는 지극히 가까이에 있지만, 특별히 결심하지 않는다면 일상에서 좀처럼 볼 수 없는 소재이기도 한 것이다. 이처럼 한지와 실의 매체적 은유에 대한 이해를 시작으로 김순철 작가의 작품을 들여다보면, 더욱 많은 내러티브를 읽어낼 수 있다. 통일신라 시기에 제작된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이 아직까지 그 원형을 보존한다거나, 세계 각국의 박물관에서 유물 복원을 위해 한지를 사용하는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한지가 지니는 가장 커다란 상징성은 그 내구성과 보존성에 있다. 때문에 김순철 작가의 작품의 베이스가 되는 한지는 고전의 특징적인 요소인 완전성과 전통성을 드러내고 있다. 이러한 전통성을 상징하는 한지 위에 그어진 바느질은 작가가 제작을 위해 소요한 시간과 반복되는 행위의 고됨이 고스란히 표현되어, 예술이 기꺼이 가져야할 노동적 측면에 대한 내러티브와 더불어 여러 측면의 대상과 대상을 이웃시키고 있다.
대상과 대상이 이웃함에 있어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는 명징한 의미 전달에 있겠지만, 태생적으로 인간은 언어적 한계에 부딪혀 대상과 대상 간의 의미전달이 완전하지 못하다. 그것이 동일한 언어와 문자를 사용한다 하더라도, 내포된 미묘한 감정까지 전달하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대상과 대상의 이웃함으로 전시의 서두를 열었다면, 이어 두 번째로 만나게 되는 작품은 재밌게도 완전한 이웃의 불가능성을 이야기한다. 류은미 작가가 채택한 ‘렌티큘러’라는 매체는 사진이 등장하던 시기와 비슷하게 탄생한 만큼 비교적 고전(올드미디어)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렌티큘러는 다수의 이미지를 n등분하여 교차배열하는데, 이렇게 제작된 이미지는 각도에 따라 이미지가 변하는 것처럼 보이게 만든다. 류은미 작가는 렌티큘러에 하나의 풍경과 화면조정 이미지를 심어두었다. 작품에서 제시된 풍경의 장소는 수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공항, 공원, 거리 등의 장소이지만, 드러난 이미지에는 누구도 존재하지 않는 공허한 장소이다. 이미지가 친근하면서 낯선 느낌을 주는 것은 원래 사람들이 있어야할 풍경이기 때문일 것이다. 풍경을 촬영하였지만 그 안의 몇몇의 요소들이 탈락되었을 때 오는 비현실적인 풍경은 올바른 풍경이 아닌 역전된 풍경임을 암시하고 있다. 그리고 조금만 눈을 돌리면 화면조정 이미지가 우리의 시선과 판단을 어지럽힌다. 화면조정은 방송에 앞서 장비의 상태를 점검하는 시간인 것처럼 작품은 우리의 판단을 점검케 한다.
방송이 종료되고 나타나는 화면 조정 이미지는 류은미 작가를 지나 세 번째 작품과 마주하도록 이끈다. 아직은 덜 펴져 약간의 형태를 유지하는 작품을 미루어보았을 때 구겨진, 아니 접혔던 흔적이 있는 종이의 과거 모습을 연상할 수 있다. 김서울 작가가 제시하는 구겨진 평면은 속이 비어있는 상자의 형태를 원형으로 하고 있다. 이러한 육면체의 모습은 모더니티(modernity)가 지니는 최종의 형태로 자리하고 있다. 현대인들이 익숙하게 생활하고 있는 아파트나 빌딩과 같은 건물들은 공간을 활용함에 있어 최고의 합리성과 효율성을 자랑하였고, 마찬가지의 이유로 다양한 사이즈의 육면체(도로, 자동차, 가구, 포장박스 등)가 도시를 가득 채우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이와 같은 효율성의 폐단을 인지하고 있지만, 효율성에 기초하여 구축된 신화를 쉽사리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김서울 작가는 모더니티한 ‘도면(접힌 자국의 종이)’ 위에 실크스크린이라는 판화기법을 통해 접혔던 흔적을 더욱 강조시킨다. 판화 기법이 가지는 특성 중 하나로 많은 수를 찍어낼 수 있는 이 방식은 공장처럼 무한대로 찍어내고 있는 모더니티한 사회상에 대한 은유로 보여진다. 이어 김서울 작가가 ‘도면’ 위에 그려내는 이미지는 일견 사회라는 시스템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순응하고 있는 일상들로 구성되어 있지만, 상자를 펼쳐내어 도면화 시킨 것은 포스트 모던적인 해체의 방식을 따르고 있다. 그렇지만 무조건적으로 모더니티를 배척하는 방식이 아니라, 합리적이고 모더니티한 방식을 사용함으로써 포스트모던을 추종하는 것이 아닌 대안적인 새로운 형태를 상상하게 한다.
또 다른 대안으로서 구겨짐을 제안했던 세 번째 작품에 이어, 마지막으로 만나게 되는 작품에서도 구겨진 이미지를 만나게 된다. 하지만 홍준호 작가의 작품에서 보이는 구겨짐은 ‘죽음’ 혹은 ‘쓸모없음’을 상징한다. 홍준호 작가의 작업노트에 따르면 다른 원형이 있는 것을 해체하는 것이 아니라, 평면적 구성의 원형을 구길대로 구겨 더 이상 쓸모없게 만들고 그 위에 다른 상징체(상징적 개념)를 입히는 방식으로 작품이 제작된다고 한다. 이와 같이 작품의 공정 방식을 참고하였을 때, 작품에서 읽히는 일차적 요소는 형이상학적으로만 존재의 유무를 확인할 수 있는 사회 시스템의 개념 혹은 예술의 본질에 대한 의심과 도전적인 태도이다. 어쩌면 이를 통해 작가는 스스로가 견지하고자 하는 예술성을 확인하려는 것처럼도 보인다. 또한 작가의 주 매체인 사진이 지니고 있는 전통성의 권위에 대한 도전으로도 해석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러한 해석의 근거는 ‘죽음’과 ‘쓸모없음’ 그리고 ‘상징체’는 예술이 지니는 기질적 특성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죽음과 상징체는 아주 오래전부터 예술이 스스로의 정체성을 표현하는 요소 중 하나였으며, 쓸모없음은 칸트 이후로 예술이 예술로써 작동할 수 있게 하는 필수적 요소로 자리하게 되었다. 사족을 붙여 설명하자면, 쓸모를 버릴 수 없었던 공예가 순수예술의 영역에서 탈락하게 된 경우가 그 반증이 될 것이다. 이렇듯 작품에서 읽을 수 있는 내용을 종합해서 정리해보면, 고전과 전통에 대한 도전의 태도를 통하여 오늘날의 사회상과 같은 다양한 문제에 접근하고 있는 것이다.
3.
전시장에서 천천히 작가들의 작품에 다가가 살펴본 바와 같이 전시에 참여하는 김서울, 김순철, 류은미, 홍준호 작가의 작품은 서로서로의 내러티브를 이어가며 하나의 유기적인 형태로 전시를 구성하고 있다. 아쉬운 점은 전시를 세심히 들여다보면 알 수 있겠지만, 참여 작가들의 작품 세계를 감히 짧은 글로써 모두 풀어낼 수는 없음에 있다. 또한 작가들은 전시에 출품한 평면 작품 이외에도 다양한 형식의 예술적 실험을 이어가고 있기에 본문에서는 《NEO SKIN》展의 기획 의도와 관련한 시선으로 이야기를 풀어내었다. 이와 같은 몇몇의 이유를 핑계로 전시장에서 마주한 작품들의 다른 내러티브를 모두 기재하지 못하였다. 하지만 한 명의 작가의 작품을 디테일하게 살펴보는 개인전이 아닌, 여러 작가들의 작품을 하나의 주제로 엮어 볼 수 있는 기획 전시만의 흥미로운 요소는, 이렇듯 하나의 주제를 두고 작가들 간의 작품들을 유기적으로 연결하여 상상하는 것과 작가들이 제시하는 것을 넘어 확장된 의미를 찾아내는 것에 있을 것이다. 서두에 풀어냈듯이, 동시대의 다양한 이슈로 객관적인 시선을 받지 못하는 시점에서 의도적으로 ‘평면’이라는 속성을 드러내며 기획된 전시가 무척이나 반갑게 다가왔다. 이처럼 네 명의 작가들이 구성하는 《NEO SKIN》展을 통해 어렴풋이 느끼게 되는 것은 어쩌면 우리는 이미 오래된 미래에 거주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