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에 비친 증언들

서문물 위의 자리(A Place on the Water)2025. 9. 12.

1.

"Wovon man nicht sprechen kann, darüber muss man schweigen."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

비트겐슈타인이 『논리철학 논고』의 마지막 페이지에 남긴 이 문장은 언어가 지닌 본질적 한계를 명징하게 드러내는 명제이다. 우리는 우리의 눈에 비친 세계의 모습을 언어로 묘사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죽음이나 폭력, 삶의 의미와 같은 근원적인 문제는 언어로 설명되지 않는다. 언어는 가장 중요한 순간에 무력해지고 그 자리에는 침묵만이 남기 때문이다. 그렇게 비트겐슈타인은 언어가 닿지 못하는 세계의 경계를 가리키고 있었다. 그리고 그 경계에 우리의 삶이 있다. 누구나 삶 속에서 말을 잃는 경험을 한다. 사회적 폭력의 현장에서, 감당할 수 없는 상실 앞에서, 혹은 타자의 고통을 마주할 때 우리는 쉽게 설명할 수 없는 침묵과 마주하게 된다. 이는 표현할 말이 없어서가 아니라, 어떤 말도 충분하지 못하기에 생기는 공백이다. '말할 수 없는 것'은 우리의 삶 속에서 지속적으로 반복되고 있다.

최선은 이러한 침묵의 자리를 정면으로 바라본다. 그는 사회적 사건과 정치적 폭력이 남긴 상처, 그로 인해 신체로부터 흘러나온 흔적, 시간이 지나도 지워지지 않고 남아 있는 상실의 잔여를 불러낸다. 또한 이 기호들은 결국 타자와 관계 맺는 방식(혹은 조건) 속에서 되살아난다. 그가 사용하는 재료들은 제도적 언어가 삭제하거나 외면한 것들이지만 작품에서는 증언이 되어 드러난다. 언어가 실패한 자리에 예술이 개입하며 증언되지 못한 것들을 붙잡아 두는 시도로써 말이다.

2.

언어가 실패한 자리에는 국가 혹은 제도가 남긴 불완전한 기록 속에서 구체화된다. 사건의 흔적은 통계나 행정적 언어로 환원되어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고통은 삭제되고 추상적 기호만이 남기 때문이다. 세월호 참사, 故 백남기 농민 사건, 구제역 살처분, 구미 불산 누출 사건은 모두 이러한 삭제의 방식 속에서 처리된 비극이었다. 그러나 최선은 그 지워진 자리에서 증언할 수 있는 재료를 찾아내어 작품으로 옮겨왔다.

2014년 세월호 참사 이후 작가는 사고 해역 앞에서 캔버스를 바닷물에 담갔다. 시간이 지나며 표면에 맺힌 소금 결정은 침몰한 배와 사라진 사람들의 흔적을 응축한 증언의 표면이 되었고, 2015년 故 백남기 농민 사건에서는 흰 캔버스를 들고 시위 현장에 서서 그 표면에 폭력의 흔적을 직접 받아내려 하였다. 실제 물 대포를 맞지는 못했지만 대신 직접 구한 캡사이신을 캔버스 표면에 칠하며 제도의 기록에서 사라진 폭력을 다시 각인시켰다. 구제역 사태 때는 돼지의 몸에서 흘러나온 기름으로 돼지의 죽음을 캔버스 표면에 되살리는가 하면, 구미 불산 누출 사건에서는 눈에 보이지 않는 재난의 공기를 천에 흡수시켜 붙잡기도 하였다.

이러한 작업들은 모두 제도의 언어가 축소하거나 은폐한 사건의 진실을 다시 드러내는 방식이다. 어쩌면 최선이 붙잡으려 한 것은 승자의 기록이 아닌 파편과 잔여 속에서 드러나는 역사적 진실이 아닐까. 소금, 캡사이신, 돼지기름, 불산 등에 물든 캔버스는 바로 그 증언의 형식으로 고정시키는 장치로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언어가 실패한 자리에 물질이 증언을 대신하고 있는 셈이다.

3.

그 증언 위 놓여진 신체에는 상처가 새겨져 있다. 사회적 폭력이 제도의 기록 속에서 숫자와 행정 언어로 환원될 때, 그 고통은 추상적 기호가 아니라 구체적인 형태로 신체에 각인된다. 각인된 상처는 몸을 다친 부위라든지 피해를 입은 흔적과 같은 사전적 의미를 가리키지 않는다. 이는 제도가 얼버무린 사건이 신체를 통해 나타나는 반증이자 시대를 고스란히 드러내는 기호이다.

최선은 바로 이 신체적 흔적을 작품의 언어로 끌어들인다. 인천의 거리에 흩뿌려진 침은 사회에서 배제된 노숙인들의 위치에서 흘러나온 고통의 기호였고, 문제아로 낙인찍힌 학생들과 함께 씹은 껌은 제도 밖에서 형성된 또 다른 창작의 언어였다. 침은 분비물이 아니라 사회적 상처가 몸을 통해 배출된 흔적으로 읽혔기에 '멍든 침'이 되어 고통의 집적이 시각화되었다. 반면 껌은 제도적 교육의 경계 바깥을 상징하는 사물로 인식되지만, 신체가 직접 만들어낸 형상이라는 점에서 억압된 목소리를 대체하는 언어가 되어 '공용어'가 아닌 '모국어'로 명명되었다. 모국어가 태어나면서부터 체득되는 가장 근원적 언어이듯 껌은 신체로부터 배출된 가장 직접적인 회화적 언어가 된 것이다. 침과 껌은 모두 사회가 외면한 자리에서 흘러나온 흔적이다. 타자가 남긴 이 자취는 지워질 수 없는 목소리이자 우리에게 응답을 요구하는 요청이 된다.

4.

그러나 타자가 남긴 자취는 단번에 사라지지 않는다. 몸에 새겨진 상처나 사건의 흔적은 시간이 흐른다고 해서 지워지지 않고, 잔여와 흔적의 형태로 현재라는 시간 속에 겹쳐 들어온다. 게다가 그것은 과거에 고정된 채 닫히지 않는다. 오히려 기억의 끝에 여전히 존재하며 오늘의 삶을 끊임없이 상기하게 한다. 그렇기에 시간은 직선적으로 과거에서 현재 그리고 미래로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남아 있는 것들이 현재에, 또 미래에 침투하는 방식으로 경험된다.

최선은 소멸되지 않고 남은 개인의 흔적을 예술적 기호로 불러낸다. <실바람>은 작가가 무연고 유골 가루를 캔버스에 뿌려 구성한 작품이다. 유골 가루는 먼지처럼 가벼워 흩날렸다가 다시 달라붙는 성질을 지니고 있었다. 이는 소멸이라 믿었던 '죽음'이라는 개념이 사라지지 않고 여전히 우리 곁에 머무르고 있다는 사실을 전하고 있다. 갑작스러운 부재가 외출처럼 느껴져 슬픔이 시작되지도 못하는 감정을 공유하는 것이다.

이처럼 작가에게 있어 개인적 경험은 시간성을 반영하는 기호로 전환된다. 개인적 경험을 넘어 사회적 경험 역시 같은 방식으로 시간성을 드러낸다. 서울 독산동의 방직 제조공장을 비롯해 한때 독산동을 밝히던 공단의 조명은 산업 구조의 변화와 함께 소등되었다. 그러나 최선은 버려진 조명을 다시 점등하여 설치하는 방식으로, 노동과 삶의 시간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여전히 현재와 겹쳐 있도록 만드는 장치로 구성하였다. <독산 회화>는 특정 공간의 역사와 기억이 우리 곁에서 어떻게 호흡하는지를 밝히고 있다.

최선은 사라지지 않고 현재와 공존하는 방식으로 경험되는 시간을 다루면서도, 시간이 소멸을 유예하는 또 다른 형식을 제안한다. <별똥 떨어지던 날>은 항암제를 물감 대신 사용하여 화면을 탈색시킨 작품이다. 약품이 발린 직후에는 변화가 보이지 않지만 하루 혹은 며칠이 지나면 탈색의 흔적이 나타난다. 항암제는 암세포만이 아니라 건강한 세포까지 파괴하는 속성을 지니기에 '죽음'과 '치료', '파괴'와 '회복'의 이중성을 함께 띠고 있다. 그렇기에 작품에 보이는 탈색의 흔적은 시간이 흐르며 서서히 진행되는 죽음의 기호이면서, 역설적으로 삶을 이어가기 위한 행위의 흔적이 된다. 그럼에도 이 작품이 '별똥'에서 제목을 가지고 오게 된 것은  작가가 별똥별이 떨어지는 날, 하늘에서 스쳐 사라지는 별의 죽음(소멸)이 소원을 비는 기호와 겹쳐 보였기 때문일 것이다. 파괴와 희망, 소멸과 염원이 교차하는 이미지는 우리 삶 속에서 시간이 유예된 채로 작동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과거와 현재가 완전히 분리되지 않고, 사라진 것이 여전히 남아 우리 곁에서 관계 맺는 양가적 장면이 담겨 있는 것이다.

5.

타자가 남긴 상처와 시간이 남긴 잔여는 결국 관계, 곧 공동체의 문제로 귀결된다. 존재는 홀로 서 있지 못하고 언제나 타자와의 관계를 통해 성립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사회적 폭력이든, 신체에 각인된 흔적이든, 시간의 잔여이든 그것들이 다시 의미를 획득하는 순간은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만들어지는 것이다. 예술은 바로 이 주체와 객체 간의 문을 두드리는 행위이며, 최선의 작업은 지워진 타자의 목소리를 복원하는 방식으로 공동체의 조건을 드러낸다. 그리고 이 조건은 타자와 더불어 이어지는 호흡 속에서 비로소 형상화된다.

호흡은 생명의 가장 근원적인 행위이다. 이는 누구도 대신할 수 없으면서도 함께 나눌 수밖에 없는 조건이다. 이와 같은 맥락으로 보자면 호흡은 개인적 행위이자 타자와 연결되는 매개이며 공존의 최소 단위라 할 수 있다. 우리가 내쉬는 숨은 타자의 숨이 전제되어야 유지될 수 있다. 우리는 타자의 존재 앞에 서야만 책임을 지고 주체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최선은 이러한 호흡, 다시 말해 날숨을 캔버스 위에 불어 넣는 행위를 통해 이미지를 구성한다. 그러나 이 형상은 작가의 숨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외국인 노동자, 조선족, 이주민 등 타자로 규정된 사람들의 숨이 함께 겹쳐져 있다. 각자의 호흡은 생존의 행위이지만, 한 캔버스 위에 겹쳐진 숨결은 타자와 더불어 존재할 수밖에 없는 조건을 드러내는 기호가 되는 것이다. 작품에서 시각화된 숨결은 사회가 주변부로 밀어낸 존재를 다시 중심으로 불러내는 요청이 되었다.

그러나 이상적 관계는 같은 공간에서 호흡한다고 해서 그것이 평화로운 공존으로 이웃되지는 않는다. 타자와 더불어 살아간다는 것은 동시에 특정한 위치로 규정되고 낙인찍히는 불안정 속에 놓이는 일의 연속이기에, 관계는 언제나 불안정성과 긴장을 동반한다. 사회는 개인의 목소리를 공존의 언어로 받아들이기보다는 정치적·이념적 잣대로 분류하고 배제하려는 습성이 있다. 최선은 이 불안정한 관계의 긴장을 시각화하며,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정체성을 〈멀미〉라는 작품으로 풀어내었다. 외국에서 스스로를 한국에서 온 작가라 소개할 때면 그 시선은 남북 분단과 핵전쟁으로 환원되었고, 국내에서의 비판적 목소리는 '빨갱이'라는 낙인으로 되돌아왔다. 최선은 이러한 시선을 군복의 카모플라주(camouflage) 패턴을 차용하여 붉은색과 푸른색이 어긋나게 겹쳐진 이미지를 그렸다. 그리고 이 두 색이 겹쳐지며 드러나는 보라색을 부재 속에서만 성립하는 가상의 위치로 제시하였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화면 위에는 보라색이 존재하지 않는다. 실제로는 붉은색과 푸른색만이 병치되어 있을 뿐, 보라색은 그것을 바라보는 눈의 작용에서만 나타난다. 다시 말해 보라색은 존재하지 않는 실체이면서, 관계의 간극에서만 발생하는 인식의 산물로 읽힌다. 작가는 이러한 불안정한 위치와 관계가 고정되지 않고 끊임없이 흔들리는 방식으로 공동체의 조건을 질문한다.

6.

이 질문은 다시 돌아와 언어가 실패한 자리에 무엇이 남는가라는 문제로 수렴한다. 비트겐슈타인은 그 자리를 침묵이라고 불렀지만, 최선은 그 침묵을 흔적과 기호의 형식으로 전환하려 한다. 사회적 사건에서 삭제된 폭력의 흔적, 신체에 각인된 상처, 시간 속에 부유하는 잔여, 그리고 타자와 함께 호흡하는 공동체의 조건은 모두 언어로 포착되지 않는 영역에 속한다. 그러나 작가는 그 부재의 자리를 비워두지 않고, 사라진 것을 되돌리는 대신 잔여로 고정시키며, 결코 완전하지 않은 증언의 형식을 제시한다.

여기서 예술은 진실을 재현하는 도구가 아니라 결여와 균열을 감당하는 형식으로 작동한다. 소금, 침, 껌, 유골 가루, 버려진 조명처럼 사라지거나 배제된 것들이 다시 떠오르지만, 그것은 온전히 복원되는 것이 아니라 유예된 상태로 머문다. 이 미완성과 불안정성은 곧 예술의 윤리적 태도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타자의 고통을 완전히 대변할 수 없다는 한계를 스스로 드러내는 것이야말로 진실에 대한 가장 정직한 대답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최선의 작업은 완결된 정답이 아니라 지속되는 질문으로 남는다. 최선에게 침묵은 언어가 실패한 자리에 남겨진 공백이 아니다. 오히려 타자의 목소리와 잔여가 다시 관계 맺을 수 있도록 열려 있는 틈이다. 언어로 닿을 수 없는 것을 끝내 붙잡으려는 시도가 아니라 붙잡히지 않는 것과 함께 살아가려는 사유의 실천인 것이다.

리플릿용 서문

침묵에 비친 증언들

"Wovon man nicht sprechen kann, darüber muss man schweigen."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

비트겐슈타인이 『논리철학 논고』의 마지막 페이지에 남긴 이 문장은 언어가 지닌 본질적 한계를 명징하게 드러내는 명제이다. 우리는 우리의 눈에 비친 세계의 모습을 언어로 묘사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죽음이나 폭력, 삶의 의미와 같은 근원적인 문제는 언어로 설명되지 않는다. 언어는 가장 중요한 순간에 무력해지고 그 자리에는 침묵만이 남기 때문이다. 그렇게 비트겐슈타인은 언어가 닿지 못하는 세계의 경계를 가리키고 있었다. 그리고 그 경계에 우리의 삶이 있다. 누구나 삶 속에서 말을 잃는 경험을 한다. 사회적 폭력의 현장에서, 감당할 수 없는 상실 앞에서, 혹은 타자의 고통을 마주할 때 우리는 쉽게 설명할 수 없는 침묵과 마주하게 된다. 이는 표현할 말이 없어서가 아니라, 어떤 말도 충분하지 못하기에 생기는 공백이다. '말할 수 없는 것'은 우리의 삶 속에서 지속적으로 반복되고 있다.

최선은 이러한 침묵의 자리를 정면으로 바라본다. 그리고 그 침묵을 흔적과 기호의 형식으로 전환하려 한다. 사회적 사건에서 삭제된 폭력의 흔적, 신체에 각인된 상처, 시간 속에 부유하는 잔여, 그리고 타자와 함께 호흡하는 공동체의 조건은 모두 언어로 포착되지 않는 영역에 속한다. 그러나 작가는 그 부재의 자리를 비워두지 않고, 사라진 것을 되돌리는 대신 잔여로 고정시키며, 결코 완전하지 않은 증언의 형식을 제시한다.

여기서 예술은 진실을 재현하는 도구가 아니라 결여와 균열을 감당하는 형식으로 작동한다. 소금, 침, 껌, 유골 가루, 버려진 조명처럼 사라지거나 배제된 것들이 다시 떠오르지만, 그것은 온전히 복원되는 것이 아니라 유예된 상태로 머문다. 이 미완성과 불안정성은 곧 예술의 윤리적 태도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타자의 고통을 완전히 대변할 수 없다는 한계를 스스로 드러내는 것이야말로 진실에 대한 가장 정직한 대답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최선의 작업은 완결된 정답이 아니라 지속되는 질문으로 남는다. 최선에게 침묵은 언어가 실패한 자리에 남겨진 공백이 아니다. 오히려 타자의 목소리와 잔여가 다시 관계 맺을 수 있도록 열려 있는 틈이다. 언어로 닿을 수 없는 것을 끝내 붙잡으려는 시도가 아니라 붙잡히지 않는 것과 함께 살아가려는 사유의 실천인 것이다.

전시장 벽면 텍스트

모국어 회화

껌은 입 안에 있을 때는 달콤한 기호식품이지만, 입 밖으로 내뱉는 순간 불결한 오물이 된다. 작가가 학생들과 함께 씹은 껌은 제도적 교육 바깥에서 형성된 흔적이자, 신체로부터 배출된 또 다른 언어였다. “껌 좀 씹었냐”라는 말에서 드러나듯, 껌은 불량함과 일탈의 기호로 사회가 규정해온 상징이기도 하다. 그러나 캔버스 위에 붙여진 껌은 혐오나 낙인의 대상이 아니라, 말해지지 못한 경험과 억압된 목소리를 드러내는 기호로 변모한다. 작가는 이를 ‘모국어’라 명명하며, 가장 근원적인 언어가 어떻게 몸에서 흘러나온 흔적 속에서 태어나는지를 보여준다.

멀미

사회는 종종 세계를 흑과 백, 옳음과 그름으로 단순화한다. 정치에서는 좌와 우로, 학교에서는 모범생과 문제아로, 일상에서는 시민과 이주민으로 나누는 식이다. 그러나 이러한 과정에서 그 사이에 놓인 수많은 스펙트럼은 지워지고, 경계에 선 존재들은 불안정한 위치로 밀려난다. 〈멀미〉는 이러한 흑백논리의 구조를 시각적으로 드러낸다. 화면에는 붉은색과 푸른색이 어긋나게 겹쳐져 있지만, 보라색은 존재하지 않는다. 보는 이의 눈에서만 섞여 드러나는 보라색은 실체가 아니라 인식의 산물이다. 이 부재의 색은 사회적 분할 속에서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자리를 상징하며, 동시에 그 자리를 살아내는 이들의 불안정한 관계를 드러낸다.

나비

숨을 쉰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행위이다. 이러한 숨은 누구도 대신해줄 수 없고, 그 누구와도 함께 나눌 수밖에 없는 조건이기도 하다. 우리는 타인과 함께 숨과 공기를 함께 마시며 살아가고, 그 관계 속에서 비로소 존재를 이어간다. 그렇기에 캔버스 위에 불어 넣은 날숨이 번져 나비의 모양을 이루는 과정은 서로 다른 사람들의 삶이 공존을 드러내는 행위가 된다. 작가는 사회가 주변부로 밀어낸 이들과 함께 나비를 제작하였다. 그들의 호흡은 일상에서 잘 드러나지 않는 억눌린 존재의 증거이자, 사회 속에서 반드시 함께해야 할 숨결이었다. 화면 위에 찍힌 나비는 '우리'라는 공존의 조건을 상징한다.

독산 회화

산업화의 흐름 속에서 도시는 끊임없이 변해왔다. 기계 소리와 불빛으로 가득했던 공장은 노동자들의 생계를 지탱하고 지역 공동체의 일상을 형성했지만 산업 구조의 변화와 함께 빠르게 사라졌다. 남은 것은 버려진 터와 꺼진 조명, 그리고 그 안에서 살아온 사람들의 기억뿐이다. 그러나 이는 과거의 잔여로 남지 않고 오늘의 시간 속에서도 여전히 겹쳐 들어오며 현재의 삶에 영향을 미친다. 작가는 이 꺼진 불빛을 다시 점등하는 방식을 통해 사라진 시간과 현재의 시간을 포개어 놓는다. 버려진 조명이 켜지는 순간, 과거의 노동과 공동체의 기억은 단절된 것이 아니라 지금도 살아 있는 현실의 일부로 드러난다. 이는 망각된 역사가 다시 오늘의 삶 속으로 스며드는 방식을 시각적으로 제시하는 장치이기도 하다.

흰그림

흰 캔버스 위에 남겨진 흔적들은 우리 사회가 기록하지 못한 사건들의 증언이다. 제도의 언어는 비극을 숫자와 행정적 수치로 환원하며 고통의 구체성을 지워버린다. 그러나 바닷물에 스민 소금, 시위 현장을 대신하는 캡사이신, 돼지의 기름, 불산의 흔적은 삭제된 진실을 드러내는 기호로 남는다. 흰색은 비어 있는 배경처럼 보이지만, 오히려 모든 색을 품은 잠재적 공간이다. 그렇기에 흰 캔버스는 지워진 기록의 자리이자, 언제든 다시 덧입혀질 수 있는 공백이며, 언어가 다다르지 못한 고통이 각인되는 장소이다. 작가는 이 흰색의 이중적 성격을 매개로 삼아, 지워진 사건들을 망각의 바깥으로 끌어내고 현재의 시간 속에서 증언으로 고정시킨다.

깊은 그림

김치는 집집마다 맛이 다르다. 같은 재료로 담가도 미묘하게 다른 맛이 나며, 발효의 과정은 맛을 더 깊게 만들기도 하고 때로는 부패로 오인되기도 한다. 발효와 부패의 경계는 모호하지만, 바로 그 모호함 속에서 차이가 생겨난다. 이러한 차이는 집집마다의 색을 구분하면서도 함께 살아가는 조건이 된다. 작가는 지역 주민들의 집에서 가져온 김치 국물로 화면을 채우며, 각기 다른 삶의 방식이 함께 모여 하나의 풍경을 이루는 모습을 시각화한다. 발효와 부패, 차이와 공존이 교차하는 자리에서 김치는 관계를 드러내는 기호가 된다.

별똥 떨어지던 날

시간은 시계의 바늘처럼 균일하게 흘러가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우리의 삶에서 시간은 늘 그렇게 흐르지 않는다. 어떤 경험은 금세 잊히는 듯하지만, 어떤 경험은 당장은 보이지 않다가 시간이 흐른 뒤에야 모습을 드러내기도 한다. 특히 상실이나 죽음 같은 사건은 과거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조금은 지연된 시간을 두고 현재 속에 다시 나타나며 우리 삶을 흔든다. 보이지 않던 흔적이 조금씩 드러나는 과정은 소멸과 지속, 파괴와 회복이 동시에 얽혀 있는 시간의 복잡한 면을 드러낸다. 하늘을 스쳐 사라지는 별똥별은 죽음을 상징하면서도 동시에 소원을 비는 기호와 겹쳐진다. 〈별똥 떨어지던 날〉은 이 양가적 의미를 항암제라는 재료로 시각화한다. 항암제는 암세포뿐 아니라 건강한 세포까지 파괴하는 이중적 속성을 지니며, 화면 위에서는 즉각적인 변화 대신 시간이 지난 뒤에야 탈색의 흔적으로 드러난다. 이 지연된 움직임은 죽음이 서서히 다가오는 과정을 가리키는 동시에, 삶을 이어가기 위한 행위의 증거이기도 하다. 작품은 파괴와 희망, 소멸과 염원이 교차하는 장면을 통해 사라짐과 남겨짐이 동시에 작동하는 시간의 본질을 시각화한다.

멍든 침

거리에 내뱉어진 침은 불결하다. 인천의 거리에서 노숙인들이 뱉은 침은 그들 스스로가 타인으로부터 도망가기 위한 행위였을까, 아니면 사회를 향한 분노였을까. 어쨌든 그들이 내뱉은 침은 사회가 그들에게 거리를 두는 근거가 되었다. 그러나 작가에게 그 침은 몸에서 흘러나온 고통의 흔적이자 사회적 상처의 표식으로 보였다. 캔버스에 표현된 침은 멍이 든 자국처럼 퍼렇게 얼룩져, 타자에게 새겨진 각인이 사회가 외면한 상처의 증언으로 전환된다. ‘멍든 침’은 그렇게 불결로 배제된 자리가 오히려 사회적 폭력의 기호로 드러나는 과정을 보여준다.

오수 회화

도시는 발전이라는 이름으로 끊임없이 새로운 풍경을 세운다. 그러나 그 기반에는 보이지 않는 흔적과 배제가 켜켜이 쌓여 있다. 난지 쓰레기 매립지 위에 세워진 건물은 겉으로는 단단해 보였으나 지면에서는 여전히 침전수가 스며 나오고 있었다. 검고 탁한 오수는 악취와 부유물을 머금고 있었지만 그 표면은 거울처럼 빛이 났다. 작가는 이 모순적인 장면에서 장식적으로 보이는 순간을 포착하여 가장 값비싼 물감으로 치환하는 회화적 실험을 시도했다. 화면 위로 옮겨진 오수는 혐오와 장식, 부패와 아름다움이 뒤섞인 채 고정되어 우리가 외면한 도시의 이면을 드러낸다. 〈오수회화〉는 폐기물로 치부된 잔여가 사실은 관계와 시간이 남긴 기호임을 드러내며 우리가 익숙하게 믿어온 가치와 의미의 경계를 다시 질문한다.

리플릿용 질문

모국어 회화

“우리는 왜 제도에서 벗어난 위치를 어긋남으로 규정하는가?”

멀미

“흑과 백으로 구분된 세계에서, 경계에 선 존재는 어디에 속할 수 있는가?”

나비

“주변부로 밀려난 존재들은 어디에서 숨 쉴 수 있을까?”

독산 회화

“소등된 빛의 잔광은 오늘 우리의 삶 속에서 어떻게 머무는가?”

흰그림

“지워진 이들의 기억은 어떻게 오늘 우리 곁에 증언으로 머무는가?”

깊은 그림

“왜 어떤 차이는 분열의 이유가 되지만, 어떤 차이는 함께 살아가는 조건이 되는가?”

별똥 떨어지던 날

“소멸은 어떻게 사라지지 않은 채 삶의 의미를 환기하게 할 수 있을까?”

멍든 침

“배제된 위치는 누구에 의해 만들어졌으며,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오수 회화

“덮여진 잔여가 어떻게 공동체의 토대가 될 수 있는가?”

도록 텍스트

흰그림

〈흰그림〉 시리즈는 예술이 무엇을 재현할 수 있는가보다, 무엇이 끝내 남아 있는가를 바라보는 작업이다. 이 연작에서 흰색은 비어 있는 바탕이나 중립적인 배경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많은 서사가 지나간 뒤, 더 이상 덧붙일 수 없는 상태로 남겨진 표면에 가깝다. 사회적 사건은 여러 방식으로 기록되지만, 그 과정에서 모든 경험이 동일한 방식으로 남지는 않는다. 설명하기 어려운 감정과 기억, 언어로 정리되지 않는 흔적들의 다수가 주변으로 밀려난다. 최선은 말해지지 않은 채 남은 것들이 어떻게 머무는지를 캔버스 위에 놓아 둔다. 〈흰그림〉에 등장하는 재료들은 모두 이러한 잔여들이다. 바닷물이 증발하고 남은 소금, 재난의 공기, 시위 현장의 기억과 같은 것들이다. 그러나 이 매체들은 스스로 의미를 주장하지 않으며, 흰색 또한 아무것도 없음을 지시하지 않는다. 〈흰그림〉은 지워졌다고 혹은 잊혀졌다고 여겨진 것들이 여전히 오늘의 시간 속에 남아 있음을 드러낸다.

흰 그림(실바람)

침묵은 흔히 말할 수 없음으로 설명되지만, 실제로는 말이 멈춘 상태에 더 가깝다. 발화가 중단되면 관계가 유지되고 있는지, 끝났는지 판단하기 어려워진다. 그래서 침묵은 죽음과 함께 언급되는 것은 아닐까. 죽은 이는 말하지 않고, 말하지 않는 이는 세계와의 접점을 잃어가는 것처럼 말이다.

〈실바람〉은 이 멈춤의 상태에서 출발한다. 어떤 일이 끝났다고 말하기에는 이르고, 그렇다고 계속 이어지고 있다고 말하기에도 모호하다. 상실은 이미 발생한 사건이지만, 그것이 언제부터 일상이 되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우리는 흔히 잊고 지낸다고 말하지만, 그 말이 정확히 무엇을 가리키는지는 쉽게 정리되지 않는다.

캔버스 위에 남은 것은 하얀 가루가 덮인 표면뿐이다. 이미지는 어떤 장면을 이야기하지 않으며, 오래 바라보아야 할 이유도 제시하지 않는다. 가까이 다가간다고 해서 다른 무엇이 드러나지도 않는다. 그럼에도 이 표면이 비어 있다고 말할 수 없는 이유는 사라졌다고 생각한 것들이 어떤 방식으로든 남아 있을 수 있다는 가능성만이 캔버스에 머물고 있기 때문이다.

흰 그림(불산 회화)

사건은 이미 발생했지만, 무엇이 어디까지 번지고 있는지는 아무도 정확히 알지 못하던 시간이 있었다. 공기는 투명했고, 위험은 형태를 가지지 않았다. 오히려 그렇기에 현장은 더 빠르게 움직였고, 판단은 지체 없이 내려졌을지도 모른다. 중화제가 부족한 상황에서 물을 뿌리는 선택은 사태를 멈추기 위한 임시 대응이었다. 그 결정은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그 순간 주어진 조건 안에서 이루어진 행동이었을 것이다.

물은 독을 씻어내지 못했다. 희석된 물은 독을 머금은 채 흘러갔고, 바람과 흐름을 따라 범위를 넓혔다. 농도는 낮아졌을지 모르지만, 어디까지가 안전한지 가늠하기는 더 어려워졌다. 위험은 더 이상 특정된 위치에 머물지 않았고, 사건은 단일한 지점으로 묶일 수 없게 되었다.

〈불산〉은 이 불확실한 시간 속에 놓인다. 최선은 사고 이후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 독기가 가시지 않은 공기에 캔버스를 노출시켰다. 화면 위에는 사건을 설명할 이미지도, 상황을 가리키는 표식도 남지 않는다. 육안으로 확인되는 것은 캔버스 본래의 흰 표면뿐이다. 이 흰색은 사건이 지워진 결과가 아니라,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지 아직 판단할 수 없던 상태를 지시한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이 안전을 의미하지는 않듯, 캔버스에는 무엇이 남았는지 말할 수 없고 무엇이 사라졌다고도 단정할 수 없는 시간만이 남아 있다.

흰 그림(캡사이신)

일상에서 보이는 광장은 안전하다. 사람들이 모이고, 대화하며, 정해진 동선을 따라 걷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안전함은 스스로 형성된 것이라기 보다 보이지 않는 규칙과 통제로부터 만들어진다. 질서가 유지되고 있다는 것은 누군가 그 질서를 관리하고 있다는 전제를 포함하기 때문이다.

이 규칙과 통제는 개인의 합의에서 비롯된다기보다는 공적인 권한에 의해 설정된다. 무엇이 허용되고, 어디까지가 가능한지, 언제 개입이 이루어질 수 있는지는 이미 정해져 있다. 평온해 보이는 풍경은 그 결정들이 작동하고 있다는 결과라 할 수 있다. 문제는 이 질서가 언제든 다른 얼굴로 전환될 수 있는 가능성을 품고 있다.

마른 낙엽이 아스팔트 위로 떨어지던 어느 날, 광장에 분사된 차가운 물줄기에 누군가가 쓰러졌다. 최선은 그 폭력을 기록하기 위해 캔버스를 들고 현장에 섰다. 그러나 물줄기는 그를 향하지 않았고, 캔버스 역시 젖지 않았다. 화면 위에는 사건을 직접적으로 가리키는 장면도, 명확한 흔적도 남지 않았다.

그럼에도 캔버스에는 이 날이 기록되었다. 작가는 백색 가루 형태의 캡사이신을 물에 개어 캔버스에 바른다. 추운 날 차가운 물줄기를 맞아야 했던 피부의 통각은, 살갗을 파고드는 이 하얀 가루의 성질을 통해 캔버스로 옮겨진다. 캡사이신 가루는 물을 만나며 성분이 변한다. 입자는 점성을 띠고, 캔버스의 조직 속으로 스며들며 표면에 엉겨 붙는다. 겉으로 보기에 특별한 흔적은 없다. 어떤 위해도 가하지 않는 것처럼,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작업을 마친 뒤 붓을 씻는 과정에서 손끝을 타고 올라온 작열감이, 캔버스에 무엇이 남아 있는지 증언하고 있다. 눈으로는 확인되지 않던 자극이 신체를 통해 다시 나타난다. 거대한 물줄기가 짓이겨놓았을 누군가의 살갗과 고통이 캔버스에 고스란히 남아있는 것이다. 눈에 보이는 것은 오직 흰색뿐이지만 하얀 표면 위에는 씻겨지지 않는 폭력의 실체가 여전히 끈적하게 달라붙어 있다.

흰그림(소금 회화)

어떤 일이 증발한 것처럼 끝이 날 때가 있다. 시간이 흐르고, 사건을 둘러싼 설명이 어느새 일상의 바깥으로 밀려나는 것이다. 정리되지 않았지만, 정리되었다고 말해지고, 모든 것이 함께 사라졌다고 단정되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이 완전히 사라졌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여전히 일상 속 어딘가에 머물고 있기 때문이다.

최선은 사고 이후의 바다에서 물을 떠와 캔버스에 적신다. 화면에 무엇을 그리지 않고, 물이 마를 때까지 기다린다. 개입은 최소한으로 유지된다. 시간이 지나 수분은 공기 중으로 사라지고, 바닷물에 포함되어 있던 소금만이 표면에 남는다. 캔버스 위에 맺힌 하얀 결정들은 어떤 장면을 가리키지 않으며, 무엇을 떠올리라고 요구하지도 않는다. 캔버스의 표면은 여전히 하얗고, 비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표면은 이미 지나갔다고 말해지는 사건이 어떤 형태로든 현재에 남아 있음을 물성으로 증언한다.

소금은 보존의 성질을 지닌다. 또한 피부에 닿으면 자극을 남긴다. 남아 있음과 통각이 함께 작동한다는 점에서, 이 결정들은 기억이 작동하는 방식과 겹친다. 잊고 지낸다고 말할 수는 있지만, 사라졌다고 말할 수는 없는 상태, 즉 필요할 때 불러내는 기억이 아니라, 일상 속에 남아 있는 감각이다. 그렇다고 작업이 실패한 수습이나 정치적 논쟁을 다시 불러내지도 않는다. 또 무엇을 기억해야 한다고 특정한 태도를 요구하지 않는다. 설명과 입장이 증발한 뒤에도 남아 있는 상태가, 그대로 캔버스 위에 놓여 있을 뿐이다.

흰그림(쓴침)

삼킨다는 행위는 안으로 들이는 선택이면서, 동시에 밖으로 내보내지 않는 상태를 포함한다. 무엇을 말하지 않기로 했을 때, 혹은 말할 수 없다고 느낄 때 감각은 몸 안에 머문다. 삼켜진 것은 사라지지 않고, 내부에 남아 지속된다.

일반적으로 침은 우리 몸 밖으로 배출되지 않는다. 의식하지 않아도 몸 안에서 자연스럽게 생성되고 삼켜진다. 그렇기에 ‘쓴침을 삼킨다’라는 표현이 일반적인 생리현상을 가리키지는 않는다. 그것은 말할 수 없는 상황에서, 혹은 말하지 않기로 선택한 순간에 어떤 의지가 몸 안에 머무는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다. 삼켜진 쓴침은 사라진 것이 아니라, 우리 내부에 어딘가에 퇴적되고 있는 것이다.

'쓴침'은 발화되지 못한 말과 겹쳐진다. 말로 옮기기에는 너무 직접적이거나, 꺼내는 순간 관계나 상황이 달라질 수 있기에 선택되지 않은 언어들이다. 이때 침은 감정을 대신하는 기호가 아니라, 말 이전의 상태를 유지하는 신체적 흔적으로 작동한다. 〈쓴침〉은 발화하지 못한 것을 시간이 지나 다시 발화하려는 시도가 아니다. 캔버스에는 여전히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무엇도 지시하지 않는다. 그것은 실패한 발화를 내부에 남겨두지 않으려는 몸의 반응이다. 말할 수 없었던 것을, 말이 아닌 방식으로라도 밀어내려는 최소한의 시도이다.

멍든 침

입안에 머물던 것이 밖으로 뱉어지는 순간, 침은 더 이상 신체의 일부로 인식되지 않는다. 거리 위에 남은 침은 말이 아니라 흔적이며, 의사 표현이 아닌 물리적인 신호로 작동한다. 우리는 그 흔적을 보자마자 동선을 바꾸고, 거리를 둔다. 그렇게 바닥에 내뱉어진 침은 접촉을 막는 경계가 되어 작동한다.

그러나 이 경계가 일방적인 회피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침을 뱉는 행위는 타인에게 다가오지 말라는 무의식적 신호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침은 보는 사람과 뱉은 사람 사이의 경계를 긋는다. 그 경계는 누군가를 보호하는 동시에, 누군가를 밀어내는 역할을 함께 수행한다.

이 경계의 흔적이 캔버스 위로 옮겨졌다. 바닥에 붙어 있던 침의 형태는 확대되어 다시 그려지고, 투명한 타액 대신 붉고 푸른 색채로 치환된다. 이 색은 피부 아래에서 고여 있다가 뒤늦게 드러나는 피하 출혈, 즉 멍의 색과 닮아 있다. 밖으로 밀려난 감각이 사라지지 않고, 신체 내부에 남아 다른 형태의 흔적으로 전환된 결과인 것이다.

멍은 결과이자 흔적이다. 원인을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누군가가 혹은 무엇엔가 타격을 받았다는 사실만은 유추할 수 있다. 캔버스에 새겨진 얼룩 역시 개인의 행위나 선택을 설명하지 않는다. 다만 침을 뱉을 수밖에 없는 위치, 멈춰 설 수밖에 없는 자리, 그리고 그 자리를 지속적으로 만들어 온 사회적 조건을 질문한다. 침은 경계를 만든 것이 아니라, 이미 형성된 경계 위에서 남겨진 흔적에 가깝다. 이 멍든 침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그렇게 그 자리에 놓일 수밖에 없었던 신체가 드러낸 흔적이 아닐까.

모국어 회화

입안에는 말로 정리되기 이전의 상태들이 머문다. 그것들은 쉽게 밖으로 나오지도, 그렇다고 완전히 삼켜지지도 않은 채 혀와 이 사이를 오가며 계속해서 씹힌다. 그런데 ‘씹는다’라는 말 안에는 서로 다른 의미가 겹쳐 있다. 하나는 생존을 위해 음식물을 으깨는 신체의 작용이고, 다른 하나는 마음에 들지 않는 대상을 헐뜯고 곱씹는 언어적 태도이다. 이 단어는 몸의 움직임과 사회적 의미를 함께 품은 채 사용되어 왔다.

학교라는 공간에서 껌을 씹고 뱉는 행위는 곧바로 문제적 행위로 분류된다. 그것은 규칙을 어기는 것이기에 교정의 대상이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행위가 곧바로 어긋남으로 규정되는 지점은 역설적으로 허가와 불가의 기준이 작동하고 있음을 전제한다. 제도는 정제된 말과 태도만을 승인하며, 그 바깥에 놓인 상태를 불온한 것으로 밀어낸다.

최선은 학생들과 함께 껌을 씹었다. 씹힌 껌은 학생들이 원하는 만큼 늘려지기도 하고 끊어지기도 하며 각자의 마음에 들게 모양을 만들었다. 그리고 이 껌들은 캔버스 위에서 검은 물감의 형상으로 확대되어 옮겨진다.이 과정에서 끈적한 물성은 사라지고, 붓질의 흔적만이 남는다. 입안에서 뭉개지고 손에 의해 늘어났던 껌은, 회화의 언어 안에서 낯설지 않은 형태로 자리 잡는다. 제도 밖에서 생성된 움직임이, 제도 안의 시각 언어와 닮은 모습으로 다시 나타나는 순간이다.

우리가 익혀 온 언어는 사회적 약속으로 정리된 말들이다. 가정과 학교에서 배운 말은 무엇을 말할 수 있는지뿐만 아니라, 어떤 상태를 드러내지 않아야 하는지도 함께 가르쳐 왔다. 이러한 맥락에서 껌을 씹으며 만들어진 이 형상은 약속된 언어로 정제되기 이전, 몸이 먼저 익힌 언어인 것이다. 제도에서 어긋난 것으로 분류된 위치에서, 가장 먼저 형성된 언어가 캔버스 위에 남아 있다. 이것은 배우지 않아도 몸이 먼저 알고 있었던, 또 다른 형태의 모국어일 것이다.

오수 회화

규칙이 자리를 잡은 뒤의 세계는 대체로 안정되어 보인다. 무엇이 문제인지, 무엇이 관리되고 있는지는 이미 정해져 있고, 더 이상 확인하지 않아도 되는 것처럼 여겨진다. 그래서 많은 것들은 설명을 요구받지 않는다.

어떤 과정으로 인해 생겨난 틈을 지나 흘러가는 오수 역시 그러하다. 그것은 판단을 요청하는 징후도, 다시 불러내야 할 사건도 아니다. 이미 흘러가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충분한 상태이며, 굳이 들여다보지 않아도 되는 것으로 취급된다. 정해진 규칙 안에 있다면 의미는 더이상 부여되지 않고, 문제 역시 발생하지 않는다.

최선은 이 흐름 속에서 어떤 형상을 발견한다. 걸레를 빨고 난 뒤 바닥으로 흘러내린 물, 여러 표면을 지나며 섞여 나온 오수의 위에는 의도하지 않은 결이 잠시 떠오른다. 거품과 빛에 반사되며 윤곽이 만들어졌다가, 곧 사라진다.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만든 것이 아니기에, 그 형상은 시선에 붙잡히지 않은 채 스쳐 지나간다.

이 오수의 결은 작가가 가지고 있는 가장 값비싼 물감으로써 캔버스에 옮겨진다. 이는 대상의 낮은 출처를 감추기 위한 선택이 아니다. 오수에서 발견된 형상은 값싼 재료로도 충분히 재현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가장 비싼 물감이 사용된 이유는, 그 형상이 이미 회화적 조건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다시 말해 최선은 재료의 가치가 아니라, 무엇이 회화의 대상으로 간주되어 왔는가에 대한 기준을 드러내고 있다. 때문에 〈오수 회화〉는 추한 것에서 아름다움을 길어 올렸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오히려 모든 것이 정리된 것처럼 여겨지는 상태, 더 이상 질문되지 않는 상태에서 회화적(예술적) 형상은 여전히 발생하고 있음을 드러낸다.

독산 회화

어떤 것들은 더 이상 기능하지 않게 된 뒤에야, 지금의 상태를 가능하게 하는 조건으로 드러날 때가 있다. 사라졌다고 여겨지는 순간이 비로소 이유가 모습을 드러내는 시점이 되는 것이다. 현재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곧 무의미함을 지시하지 않는다. 오히려 지금의 풍경이 성립되기까지 무엇이 작동해 왔는지를 되묻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독산동 일대에 남아 있던 공장들은 한때 이 도시의 삶을 밝히던 장소였다. 그러나 산업 구조의 변화와 함께 공장은 이전되거나 문을 닫았고, 불빛은 하나둘 꺼졌다. 최선은 바로 이 시기에 독상동 일대의 조명을 수집했다. 이미 역할을 다하여 버려진 물건이 아니라, 이전되는 순간에 확보된 조명이었다. 다시 말해 조명은 사라지는 과정 속에서 건져 올려진 사물인 것이다. 그렇기에 이 조명들은 과거의 흔적이라기보다, 지금의 상태가 형성되기까지 작동해 온 서사의 상징이 된다.

그렇게 설치된 조명들은 당연하게도 동일하게 작동되지 않는다. 어떤 것은 여전히 안정적으로 점등되고, 어떤 것은 깜빡이며, 또 어떤 것은 끝내 켜지지 않는다. 그러나 이 차이는 결함이나 실패를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각각의 조명은 기능이 멈춘 이후에도 서로 다른 방식으로 시간을 증언하고 있기 때문이다. 〈독산 회화〉에서 불빛은 현재를 밝히기 위한 장치가 아니다. 과거를 재현하거나 향수를 불러오기 위한 상징도 아니다. 현재에는 없지만 과거에는 분명히 존재했던 것, 그리고 그 존재가 지금을 가능하게 했다는 사실, 이는 지금의 도시가 어떤 서사 위에서 성립해 왔는지를 드러내는 물리적 증거로 기능한다. 그렇기에 독산의 불빛은 다시 켜진 것이 아니라 여전히 남아 있는 것이다.

멀미

서사는 언제나 세계가 명확한 기준 위에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한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 또 무엇이 중심이고 주변인지를 구분함으로써 세계는 이해 가능한 구조를 획득한다. 그러나 이러한 구분은 고정된 진리라기보다, 상황과 맥락에 따라 설정되고 조정되어 왔다. 우리는 이 기준이 언제든 흔들릴 수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것이 만들어내는 안정감에 익숙해져 있다. 기준이 분명할수록 세계는 설명하기도 이해하기도 쉬워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의 삶이 언제나 이 구분 안에 정확히 들어맞는 것은 아니다. 많은 상태들은 기준의 안쪽이나 바깥이 아니라, 그 사이에 머문다. 어느 쪽으로도 단정되기 어려운 이 위치는 판단이 보류된 채 남아 있다. 그렇다고 해서 이 중간의 자리가 오류나 예외라고 말할 수도 없다. 이는 기준이 작동하는 방식과 그 한계를 동시에 드러내기 때문이다.

캔버스에는 붉은색과 푸른색이 반복적으로 겹쳐져 있다. 두 색은 서로를 흡수하지도, 그렇다고 완전히 분리되지도 않은 채 같은 공간을 점유한다. 그 경계에는 보라색이 드러나지만 이 색은 의도적으로 혼합된 결과가 아니다. 붉은색과 푸른색이 각각 입혀진 캔버스 위, 그리고 우리의 망막 위에서 혼합되는 것처럼 보일 뿐이다. 보라색은 선택된 색이 아니다. 어느 한쪽으로도 규정되지 않은 위치가 만들어내는 시각적 결과이다. 그리고 이것은 위치가 결정되기 전뿐만 아니라, 결정되고 난 이후에도 지속된다.

깊은 그림

흔들리는 위치에 있다는 것이 늘 혼합색과 같은 위치에 있다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근원적으로 '나'와 '너'라는 차이를 전제로 세계에 놓여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차이는 흔히 구별 짓기의 도구로 사용된다. 서로 다름이 확인되는 순간, 그것은 우열이나 정답과 오답의 문제로 환원되곤 한다. 다르다는 것은 곧 낯선 것으로 인식되고, 낯섦은 배제되거나 교정의 대상으로 다뤄진다. 그렇게 차이는 위계를 만들고, 경계를 세우는 근거로 작동해 왔다.

그러나 모든 차이가 분열로 귀결되는 것은 아니다. 한국의 식문화인 김치는 차이가 작동하는 또 다른 방식을 보여준다. 집집마다 김치를 담그는 방식은 다르고, 재료의 비율이나 절임의 정도, 사용하는 젓갈에 따라 맛은 제각각이다. 그럼에도 이 차이는 옳고 그름의 판단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우리 집 김치 맛'과 '이웃집 김치 맛'은 서로 다르지만, 그 다름은 배척의 이유가 아니라 각자의 고유한 성질로 받아들여진다.

최선은 이러한 김치 국물을 종이에 덧바른다. 검붉은 액체는 종이에 머무르며 공기와 반응하고 시간의 흐름 속에서 점차 색을 바꾸어 간다. 처음의 선명함은 사라지고, 분홍빛의 색감만 남는다. 우리가 '깊은 맛'이라 부르는 미각적 경험이, 시간의 축적을 통해 시각적 깊이로 전환되는 과정이다. 이러한 '깊은' 차이는 서로 충돌하거나 배척하지 않는다. 어쩌면 서로 다른 성분들이 위계를 세우지 않고, 시간을 함께 보내며 어우러지는 이 시각적 변화가 서로 다름이 유지된 채, 하나의 깊이를 이루는 가능성은 아닐까.

나비

차이가 고유한 깊이로 받아들여지는 세계가 있는 반면, 어떤 차이는 여전히 경계의 이유가 된다. 그럼에도 우리는 모두, 어떤 위치에 놓여 있든 멈출 수 없는 행위를 수행하며 존재한다. 바로 숨을 쉰다는 사실이다. 호흡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누구도 대신해 줄 수 없고, 잠시 유예할 수도 없다. 가장 사적이면서도 가장 보편적인 이 행위는, 동시에 같은 공기를 나누는 세계 안에서 이루어진다. 타자의 날숨은 언제나 나의 들숨과 맞닿아 있다.

최선은 이 조건을 이미지로 옮긴다. 물감을 향해 내뿜는 숨은 캔버스 위에서 흔적으로 남는다. 힘껏 내뱉은 날숨에 의해 물감은 흩어지고, 통제와 우연이 겹친 형상이 만들어진다. 그 형상은 숨이 지나갔다는 사실, 여기에 살아 있었다는 증거로 남는다.

캔버스에서 날개짓 하는 형상들은 모두 다른 모습을 지닌다. 그러나 그 차이는 우열을 만들지 않는다. 서로 다른 숨이 각기 다른 흔적으로 남았을 뿐이다. 나비들은 주변과 중심을 가르는 기준을 해체하지도, 새로운 질서를 제안하지도 않는다. 다만 우리가 이미 같은 공기 속에 놓여 있다는 사실과 그 조건만으로도 서로의 삶이 결코 무관할 수 없음을 드러낸다.

별똥 떨어지던 날

서로 다른 숨결이 같은 공간에 겹쳐 있다는 사실은, 누군가와의 관계를 어떻게든 이어가고 싶다는 보이지 않는 의지로 해석할 수 있다. 숨을 쉰다는 것은 가장 기초적이고 사적인 행위이지만, 홀로 머물 수 없는 생의 조건이기도 하다. 그러나 삶은 그 의지를 시험하듯, 신체 내부에서부터 예고 없는 균열을 만들어낸다. 이것은 어쩌면 흘러가지 못하고 몸 안쪽에서부터 쌓여버린 시간이 터져 나오는 것일지도 모른다.

보이지 않게 고여 있다가 한참이 지난 뒤에야 모습을 드러내는 이 시차(時差)는 밤하늘을 스치는 별똥별과 닮아 있다. 떨어지는 별은 스스로 연소하며 사라지는 물리적 소멸 과정이지만, 역설적이게도 사람들에게는 간절한 소원을 비는 희망의 기호로 읽힌다. 최선은 이 시차를 별똥별에 대입하여 항암제와 표백제라는 재료를 통해 시각화한다. 암세포뿐 아니라 건강한 세포까지 파괴하는 항암제의 이중성은, 살리기 위해 죽여야 하는 아이러니를 품고 있기 때문이다.

검붉은 보라색의 표면 위로 떨어진 그것들은 닿는 순간에는 즉각적인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약물은 섬유 조직 사이로 스며들어 머무르다 시간이 지나서야 서서히 색을 분해하기 시작한다. 그 과정은 의도가 개입하여 조절할 수 없다. 중력과 화학적 반응만이 만들어낸 무작위적인 궤적만이 별무리처럼 남는다. 우리가 별똥별을 보는 것과 같이 이 하얀 점들은 멀리서 보면 반짝이는 은하수 같기도 하지만, 실제로는 색소가 박리(剝離)된 자리들이다.

별이 떨어진 자리에는 표백된 공간들이 곳곳에 남아 있다. 떨어진 별들이 가고자 했던 지점은 어쩌면 ‘흰 그림’이 아닐까. 가득 차 있던 색이 벗겨져 내려간 그 끝에는 우리가 처음 마주했던, 아무것도 없지만 모든 것이 담겨 있던 그 하얀 표면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