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 세계가 멸망하더라도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
평론김서울2025. 10. 30.
1.
아마도 적지 않은 이들이 '아우라(aura)'라는 단어를 만화나 애니메이션의 한 장면에서 처음 만났을 것이다. 압도적인 존재가 몸에서 뿜어내던 불가해한 기운이나 화면을 가득 채우는 기세와 같은 분위기를 지칭하던 이 용어는 언젠가부터 일상의 언어가 되었다. 오늘 우리는 누군가의 분위기나 존재감을 설명할 때 "아우라가 있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놀랍게도 '아우라'라는 단어의 기원은 '기술 복제 시대'에 그 개념이 만들어졌다. 기술 복제가 예술을 뒤덮기 직전의 시기, 원본이 지녔던 유일성을 가리키기 위해 이름 붙여진 단어였다. 그렇게 '아우라'는 먼지가 가득 쌓인 역사성, 즉 작품이 품은 시간의 두께와 대체할 수 없는 현존감을 지시했었다. 그러나 한때 원본의 존엄을 지키기 위해 사용되던 이 단어가 오늘날에는 오히려 무한히 반복되고 소비되는 방식으로 살아남아 있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원본을 방어하던 개념이 아이러니하게도 복제의 언어가 되어버린 셈이다. 이제 우리는 아우라가 사라진 시대, 아니 '원본 없는' 아우라가 지배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오늘 우리가 아우라의 사라짐을 말하기 전에, 그 이름이 없던 세계가 있었음을 떠올려보자면, 그 시기에는 '원본'이라는 개념조차 요구되지 않았다. 모든 것은 그 자체로 거기 있었고 증명 없이 작동했다. 신화가 일상에 스며 있었고 세계가 증명 없이도 믿어지던 때였기에 사물은 설명되지 않아도 존재할 수 있었으며, 설명이 뒤따르지 않아도 세계를 또렷하게 볼 수 있었다. 그때의 아우라는 개념도 아니었을뿐더러 '있음'과 '없음'에 대한 질문조차 성립되지 않았다. '있음'이라는 사실 자체가 질문보다 앞서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믿음의 신화가 자리에서 물러날 무렵, 모든 존재는 더 이상 아무런 이유 없이 '거기에 있다'라고 말할 수 없게 되었다. 이런 시기에 세상의 모든 것을 의심하며 생각하던 사람은 세계를 'x축'과 'y축' 위에 올려두고, 설명 가능한 단위로 해체하고 재편하려 하였다. 존재는 좌표와 계산으로 배치되었고, 세계는 점과 선으로 정렬되었다. 그렇게 평면화된 세계에서 아우라는 그것을 감지할 필요조차 없었던 셈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이미지 또한 세계의 흔적이 아니라 정렬 가능한 정보가 되었고, 진실은 표면 위에서 찾아야 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진실이 2차원의 '표면(평면)' 위에서만 탐색되어야 하는 시대의 조건은 명징한 형식을 띨 수밖에 없다. 그것이 바로 그리드(grid)이다. 모더니티(modernity)적 사유에서 그리드는 도식이나 패턴을 통해 세계를 이해하고 구성하려는 방식의 구조이자, 사유를 평면 위로 불러내는 일종의 운영체제라 할 수 있다. 보편적인 인식이 그렇듯 그리드를 수학적 혹은 기하학적 배치 정도로 재단할 수 있겠으나, 근대가 세계를 사유하고 배열하기 위해 채택한 인식론적 장치이자 하나의 시대정신에 가깝다. 그것은 사물을 '측정' 가능하게 만들고, 경험을 단위로 '분할'하며, 세계를 '통제' 가능한 구성 요소로 환원시키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아우라가 '유일성·시간의 축적'이라는 수직적 질서에 기반한다면, 그리드는 '반복·평면·동시성'이라는 수평적 질서를 통해 작동한다. 다시 말해 같은 모더니티를 배경으로 하더라도 그리드는 아우라가 전제되는 세계와는 전혀 다른 사고 체계인 것이다. 이 체계는 효율과 균질성을 기준으로 작동한다. 좌표가 등장한 순간부터 사물과 현상은 고유한 의미나 맥락보다는 위치와 관계 값으로 판단되기 시작했다. 별은 신화적 상징이 아니라 특정 좌표값을 가진 점이 되었고 빛은 이데아가 아니라 속도와 에너지를 값으로 측정되는 대상이 되었다. 어쩌면 이러한 세계의 변화가 '1+1=2'와 같이 너무나 명징한 답마저도 믿지 못했던 어느 의심병 환자 때문에 비롯된 일일지도 모르겠다.
2.
그 의심병 환자의 질문은 아직도 유효하다. 세계가 정말 이 평면의 질서만으로 설명 가능한가라는 질문은 사라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늘날에도 이와 같은 의심을 품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들은 대체로 예술가일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김서울 역시 그 가운데 한 사람이라 할 수 있겠다.
'상자' 시리즈는 작가의 의심을 명확하게 드러낸다. 그리드라는 거대한 언어가 어떻게 시스템으로 작동하는지를 파고들기 때문이다. 상자는 그리드라는 2차원의 논리가 3차원으로 확장된 결과물이다. 작가는 이 입체적 구조를 다시 평면으로 펼치는 방식을 택하여 그리드가 세계를 조직하는 방식을 역추적하였다. 그 과정에서 드러나는 접힌 자국은 세계를 좌표와 단위로 환산하려는 체계가 남긴 결과로 풀어내었다. '상자' 시리즈는 표면과 구조의 관계를 분석적으로 드러내는 실험에 가까웠다. 단, 상자를 펼쳐 보이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작가는 펼쳐낸 표면 위에 실크스크린을 얹는다. 실크스크린이 한 이미지를 수차례 복제한다는 맥락에서, 오늘날 이미지가 세계 속에서 확산되는 방식과 구조적으로 닮아 있기 때문에 택한 방식이었다. 즉 단일한 원본을 기준으로 하던 질서가 사라지고, 반복 가능성과 유통 속도가 원본의 무게를 대신하게 된 시대의 도구로써 작동되는 것이다.
이때 작가가 선택한 이미지는 거대한 서사가 아닌, 지극히 사소한 일상의 단편들이다. 그런데 이 '일상'이라는 개념 또한 흥미롭다. 일상은 아우라와 마찬가지로 그리드가 지배하는 모더니티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아우라가 원본의 유일성이 붕괴되는 지점을 진단하기 위해 등장한 개념이라면, 일상은 그리드가 삶 속에 정착시킨 '반복성'과 '규격화'의 조건을 가리킨다. 다시 말해 일상은 복제의 원리가 인간의 삶에 스며든 양식이자, 모더니티가 낳은 시간 구조의 또 다른 이름이다. 따라서 실크스크린이라는 제작 방식과 일상이라는 이미지는 '상자'시리즈에 있어 논리적 당위성을 부여한다. 또한 이러한 작업적 프로세스는 실크스크린이 이미지를 생산하는 수단이 아니라 이미지가 어떻게 세계를 동일한 단위로 분절하고 확산시키는가를 실험하는 장치로 읽히게 한다. 그렇기에 작가에게 복제는 이미지의 복제라기보다 오늘날의 사유 방식과 세계의 질서를 반복해 드러내는 과정이 된다. 그 평면적 반복 속에서도 동일하게 재현될 수 없는 시간과 변형이 여전히 남아 있음을 확인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작업에서 작가가 발견한 것은, 표면을 해체하고 반복을 의심하는 것으로도 세계의 '깊이'에 도달할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펼쳐낸 표면을 다시 들춰내야 했다. 그렇게 작가는 그리드라는 지표면의 아래층에 놓인 사물(thing)의 자리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3.
이렇게 김서울의 시선이 지표면 아래로 향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예술적 형식을 실험하는 과정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실존의 문제에 있었다. 김서울은 일본에서의 유학 기간 중 일본 대지진을 경험하면서, 세계는 좌표 위에 놓인 개념이 아니라 언제든 흔들릴 수 있는 기반임을 처음으로 체감한 바 있다. 이 어마어마하고 무시무시한 사건은 당연하게도 의심과 같은 질문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세계는 평면으로 설명될 수 있는가' 혹은 '나는 이 땅(세계) 위에서 어떻게 존재하는가'라는 질문으로 말이다. 그리고 그 질문은 팬데믹 이후 뚜렷한 방향을 갖게 된다. 바쁘디 바쁜 현대의 세계가 멈추는 충격은 김서울에게 더 이상 표면을 해체하는 방식만으로는 충분치 않음을 다시 한번 자각하게 하였다. 좌표로 해석되는 세계가 아니라, '머무름'과 '축적'이 작동하는 다른 질서를 사유해야 했다. 분석의 방식에서 존재의 자리로, 표면 위에서 지층으로, 눈앞의 세계에서 발을 딛고 선 땅의 시간으로 이동하려는 인식이 확고해진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3차원의 상자를 2차원의 평면으로 펼치던 작업 방식은, 판(plate)을 다시 3차원의 석고로 떠내는(casting) 방식으로 방향을 바꾸게 된다. 펼치기에서 떠내기로, 표면을 드러내던 태도에서 깊이를 파고드는 태도로의 전환인 셈이다. 그렇기에 이것은 제작 방식의 변화가 아니라, 세계를 바라보는 관점의 이동인 것이다. 그리고 이 '관점의 이동'은 작가가 다루던 판이 그리드라는 운영체제를 드러내는 장치에서 시간과 사물이 충돌하고 반응하는 지점이라는 사실을 마주하게 하였다. 이를 기점으로 작가에게 판은 매개나 도구가 아니라 하나의 주체적 존재가 된다. 부식과 송진, 기름과 온도, 기다림과 우연 등이 개입하는 방식으로 작가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스스로 흔적을 남기는 상대로서 작가와 마주하는 것이다. 작가에게 판은 일방적으로 제어 가능한 대상이 아니라, 반응하고 저항하며 스스로 형상을 구축하는 (작가의 위치와) 동등한(?) 존재이다. 때문에 판 위에 새겨지는 것은 이미지의 형식을 띤 시간이자 변화의 누적이 된다. 실크스크린이 반복된 일상을 드러내는 행위였다면, 캐스팅은 표면에 남은 시간을 발굴하거나 사물에 침전된 변화를 떠내는 일이다. 그렇게 그리드가 요구하던 즉각적이고 균질한 시간과는 반대로, 느리고 불균질하며 되돌릴 수 없는 아우라를 가진 시간이 작품의 주제로 자리하게 된다. 작가는 그 흔적을 떠내며 질문한다. 평면이 세계를 정렬했다면, 사물은 세계를 어떻게 기억하는가.
4.
그리드가 배제한 '느리고 불균질한 시간'의 등장은, 그간 진행된 '발굴'이라는 존재론적 방법론과 모순처럼 보이는 장면을 불러온다. 바로 식물의 등장이다. 작가의 사유와 실천은 '-z축', 즉 'x축'과 'y축'이라는 표면에서 그 아래로 침잠하는 방향으로 전개되어 왔다. 부식, 압력, 잔류물, 되돌릴 수 없는 변화 등의 속성들은 모두 세계를 좌표가 아닌 '지층'으로 이해하려는 시도였다. 그런데 작품의 이미지는 '+z축', 즉 위로 자라고 유지되는 시간에 닿고 있다. 지층을 향하던 사유가 갑자기 식물이라는 지상의 사물로 이동한 것이다. 이 전환은 얼핏 작업의 오류처럼 보인다. 침잠(-z)과 발아(+z)는 동일한 언어로 설명되기 어려운 구조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변화는 역행이 아니라 시간 구조의 확장이다. 작품에서 식물은 장식적이거나 상징적 기호로 작동하지 않는다. 식물은 아래로 내려가면서 동시에 위로 성장하는 시간의 구조를 가진 사물이다. 뿌리는 지층으로 내려앉고(-z), 줄기는 지상으로 솟는다(+z). 이렇듯 식물은 축적·압력·비가역성이라는 '지층의 시간'과, 유지·성장·돌봄이라는 '생장의 시간'을 동시에 가진다. 이렇게 '+'와 '-'를 동시에 띠는 식물의 구조는 작가가 또 하나의 주체로 마주한 판의 시간적 맥락과 동일한 선상에 놓여 있다. 판이 작가에게 저항(-) 하더라도, 작가는 그 판과 지속적으로 대화하며 돌봄(+)으로써 시간을 하나의 구조 안에서 동시에 품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유(실천)와 역설적 이미지의 배경에는 작가의 경험이 비롯되어 있었다. 일본 대지진과 팬데믹의 사건 속에서 김서울은 자신도 모르게 식물을 가꾸고 있었다고 말한다. 도대체 누가 말한지 모르겠지만, 세계가 종말할 때 정말로 사과나무를 심을 사람이 있을 것이라는 증명이 된 셈이다. 어쨌든 이 '사과나무'의 행위는 '종말'이라는 절대적 절망(-z)과 '심기'라는 미래를 향한 의지(+z)가 공존하는 가장 극적인 역설이다. 김서울이 겪은 실존적 종말의 순간에 식물을 가꾸었던 행위는 바로 이 역설이 이미지로 전환되는 기점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어째서 그 이미지가 식물로 향했을까'라는 질문이 남는다. 이는 작가가 작업에서 다루던 보편적 이데올로기('상자' 시리즈)가 실존적 서사로 이행될 때, 반드시 획득해야만 하는 필연적 귀결이기 때문이다. 보편성은 거대 담론이라는 지위와 다수의 성명을 무기로 개별성을 묵살하는 속성을 지닌다. 그런데 실존은 그 대척점이라 할 수 있는 개인적 서사로부터 비롯한다. 김서울이 겪었던 물리적 기반(지진, 팬데믹)의 붕괴가 보편성의 논리를 무력화시켰을 때, 그 사이에서 무너지지 않고 서 있었던 것은 사적인 '개별성'이었다. 아니, 그 개별성은 무너지지 않았던 것이 아니라, 애초에 보편성이 개별성을 모두 다룰 수도, 설명할 수도 없었다는 것이다. 무너진 것은 각각의 개체를 꼬치 꿰듯 설명하려던 보편적 논리뿐이었다. 때문에 작가는 흔들리지 않는 기반을 재구축하기 위해 사적인 개별성, 즉 개인적 기억과 경험을 불러올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그 사적인 개별성은 어째서 식물이라는 이미지로 새겨져 있었을까? 작가가 오래된 기억에서 발굴하려 한 원형은 '절대적 안전' 혹은 '유토피아'의 기호였다. 김서울은 아주 어린 시절에는 화단을 가꾸던 할머니의 집에서 살았고, 이후에는 어머니가 화분을 가꾸시는 모습을 보며 성장했다. 이 기억 속에서 식물은 어른이라는 견고한 세계에 의해 그 무엇으로부터도 보호받던 안전한 유년 시절, 그 자체의 기호였던 것이다. 즉, '돌봄받는 식물'은 '보호받던 유년의 자아'와 동일시되는, 흔들리지 않는 기반의 무의식적 상징인 셈이다. 다시 말해 그 절대적 안전의 경험은 '할머니의 화단'과 '엄마의 화분'으로 기억되는 식물로 새겨지게 된 것이다. 그렇기에 작가가 석고로 떠낸 이 3차원의 결과물은 '식물의 재현'이 아니다. 오래된 기억(개별성)을 오늘(의 사유)로 떠내는 실천과 판에 새겨지는 매체(부식)의 시간을 분리 불가능하게 만들어, 하나의 사물로 응축된 '화석화(z축)' 시키는 것이다.
5.
'상자' 시리즈든 '식물' 시리즈든 작가의 작업 방식을 따라가 보면, 판화라는 매체가 이미지의 매개나 복제의 기술로써 사용된다고 단정할 수 없다. 작가는 복제의 조건을 의심하는 데서 출발하여 그리드라는 표면의 질서를 해체하였고, 실존적 충격을 기점으로 사물의 지층으로 내려앉았으며, 마침내 시간과 사유가 그 사물에 축적되는 순간을 포착하는 방향에 이르렀다. 이는 '이미지의 운명', 즉 이미지가 원본의 그림자로 남을 것인지, 혹은 사물 그 자체의 존재론적 사건이 될 것인지를 다시 질문하는 과정이자 작가의 실천적 태도라 할 수 있겠다.
따라서 작가가 남기는 표면의 이미지는 조형 언어로서의 외형이 아니라, 사물이 감내한 시간의 압력과 사유가 압축된 지층으로 설명된다. 그리고 이 지점에서 아우라는 다시 모습을 드러낸다. 그것은 원본의 위계를 복구하거나 기원을 회상하는 방식이 아니다. 되돌릴 수 없고 또 반복될 수 없는 시간이 새겨놓은 흔적이며, 축적된 변화가 만들어낸 고유성이다. 원본 없는 아우라가 지배하는 시대에, 작가는 원형의 층에서 발생하는 아우라, 즉 축적된 시간을 통해 아우라의 형식을 다시 제안한다. 이런 의미에서 작가는 판화를 도구로서의 방법론을 넘어, 사유의 형식으로 되돌리려 시도한다. 세계가 쌓이고 변화하는 원리를 드러내는 태도로써, 또 표면 이후의 시간을 다루는 실천으로써 말이다. 그런데도 작가의 질문은 닫히지 않는다. 그리드 위에 놓였던 세계가 보지 못했던 (비합리적인) 시간을 어떻게 예술을 통해 증명해야 하는가. 작가의 작업은 그 질문이 여전히 유효하다는 사실도 함께 남겨두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