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랜 풍경
평론서지2026. 3. 5.
1.
오래된 사진은 바랜다. 처음에는 색이 조금씩 빠지다가, 종래에는 무엇을 찍은 것인지 알아보기 힘들정도로 산화된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상태의 사진이 더 오래 들여다보게 만들기도 한다. 선명했을 때는 그냥 지나쳤던 것들, 흐릿해지고 나서야 비로소 눈에 걸리는 것들이다. 바랜다는 것은 사라지는 과정이지만, 동시에 무언가가 더 선명해지는 과정이기도 하다. 있었던 것을 붙잡으려는 시도. 그래서 사진을 흔적이라 부르는 것은 아닐까. 슬픈 것은 그 붙잡음 자체가 이미 상실을 전제한다는 것이다. 셔터를 누르는 순간, 사진은 과거가 된다. 시간이 지날수록 원본과 멀어지고, 색이 빠지고, 어떤 부분은 지워지기까지 한다. 남는 것은 있었던 것이 아니라, 있었다는 사실의 희미한 기억이다. 경계가 지워진 자리에 남은 것들이 있다. 식물에서 직접 뽑아낸 잉크가 면천 위에 켜켜이 쌓이고, 또 닦여나간다. 시간이 지나면 색은 스스로 빠져나간다. 의도한 것이 아니지만, 그 결과가 오히려 더 정확할 때가 있다. 오래된 사진처럼.
2.
사진이 바랜다는 것은 어쩌면 두 번의 소멸이라 할 수 있겠다. 찍힌 순간 이미 과거가 된 장면이 시간이 지나면서 다시 한번 지워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는다. 색이 빠지고 입자가 거칠어진 자리에 무언가가 남는다. 있었다는 어렴풋한 증언. 원본을 복원하지 않으면서, 원본이 사라졌다는 것을 오히려 더 선명하게 드러내는 것. 흔적은 그런 방식으로 작동한다.
찰나와 영원은 반대말처럼 들리지만, 흔적 안에서는 그 경계가 흐릿해진다. 셔터를 누르는 순간은 찰나지만, 바랜 사진은 그 찰나를 수십 년째 붙들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사라지는 과정이 오히려 지속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이번 전시의 제목이 '영원히 찰나적인'이라는 역설적인 문장으로 구성된 것은 찰나이기 때문에 영원할 수 있다는 사실, 다시 말해 영원한 것은 사실 찰나들의 축적이라는 것이 작품의 서사에 녹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흩어지는 숨의 파편들〉은 종이에 식물 잉크로 그려진 28점의 작은 조각들로 이루어진다. 하나하나만 놓고 본다면 왠지 모르게 미완성처럼 보이거나 한없이 가벼워 보이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전시장에 군집되어 놓였을 때, 그 불완전함들이 모여 하나의 호흡을 만들어낸다. 숨이 내뱉어지는 순간은 찰나지만, 공간 안에 퍼진 그 흔적은 머무는 것이다. 28개의 조각은 그러므로 하나의 찰나가 28번 흩어진 증언인 셈이다.
3.
그런데 그 흔적을 만드는 재료들 자체도 이미 사라지고 있다. 서지가 재료로서 선택하는 것은 재미있게도 양파 껍질, 무화과, 찻잎, 아보카도, 치자, 적양배추 등이다. 작가가 실제로 먹고 마시는 것들에서 색을 뽑아내는데, 버려질 것들이나 이미 소비된 것들의 잔여에서 시작하는 것이다. 이 선택이 일견 친환경적 태도로 보일 수 있으나, 재료 자체가 이미 소멸의 과정을 거친 것들이라는 점에서, 작업의 주제와 재료가 같은 시간을 살고 있음을 증명한다.
그런데 이 재료들은 작가의 의도를 그대로 따르지 않는다. 처음에 서지는 푸른 바다와 백화된 산호의 대비를 계획했다고 한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색이 스스로 빠져나갔다. 난색만 남은 결과는 계획과 달랐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계획보다 더 주제에 명징하게 다가오게 되었다. 작가가 말하려던 것을 재료가 스스로의 언어로 말해버린 것이다.
밀랍도 같은 맥락에서 읽을 수 있다. 꿀벌이 만든 것을 쓴다는 것은 이미 다른 생명의 시간이 스민 물질을 작업 안으로 끌어오는 행위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서지가 재료를 고를 때 따르는 기준은 어쩌면 용도나 목적보다는 시간성에 있는 것은 아닐까. 고정되지 않고 흘러내리는 것, 팽팽하게 당겨지지 않은 것. 재료들은 각자의 시간을 갖고 있고, 작가는 그 시간과 협의한다.
서지는 이것을 '소극적 개입'이라고 말한다. 대지미술처럼 자연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지 않으며, 그렇다고 완전히 손을 놓는 것도 아닌 경계의 언저리. 할 수 있는 만큼만, 최소한의 개입이라는 태도는 어쩌면 흔적의 속성과 무척이나 빼닮아 있다. 완전히 개입하지도 완전히 물러서지도 않는 것, 그 사이 어딘가에서 무언가가 남고, 남기는 것처럼 말이다.
4.
어쩌면 그 태도는 시간으로 인해 생긴 것은 아닐까. 오랫동안 다른 일을 하다가 작업으로 온 사람의 눈은 처음부터 작가였던 사람의 눈과는 다를 수밖에 없다. 더 많은 것을 잃어본 눈, 그래서 더 작은 것에 머무를 줄 아는 눈이 생겼을 수 있겠다. 서지가 아를의 습지와 론강과 지중해를 거치면서 자아 안으로 향하던 시선을 밖으로 돌린 것도 그런 맥락에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 바깥에는 안전한 자연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유럽에서의 생활은 전쟁을 목전에 두고 사는 삶이기도 했다. 러시아, 우크라이나, 팔레스타인 친구들. 거대한 것들이 무너지고 사람들이 사라지는 것을 가까이서 듣는다. 그 앞에서 누구든 자연스럽게 드는 질문이 있을 것이다. 이 모든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작업이, 예술이, 아름다운 것들이 말이다.
〈층을 이루는 물의 시간〉은 이러한 질문이 작업으로 전환된 방식을 보여준다. 광물, 산호, 지의류, 식물, 돌, 마른 가지, 밀랍, 물, 모래시계, 향과 같은 재료들로써 말이다. 인간의 시간과 비인간의 시간이 한 공간 안에 층층이 쌓인다. 모래시계는 인간이 발명한 시간을 측정하는 도구지만, 산호와 지의류는 인간의 시간 단위로는 잴 수 없는 속도로 산다. 이 둘을 같은 자리에 놓는다는 것은, 인간의 시간이 유일한 기준이 아니라는 것을 공간 안에서 몸으로 느끼게 하는 방식인 것이다.
작가는 전시가 끝나면 자연물들을 돌려보낸다고 한다. 일시적으로 빌려온 것들이기 때문이라고 말이다. 이 태도 안에는 소유하지 않으려는 윤리가 있다. 거대한 담론을 외치는 것이 아니라, 전시장 안에서 잠시 함께 있다가 각자의 자리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이 어쩌면 여기에 있을 수 있겠다. 작은 것에 집중하는 것, 지금 할 수 있는 것을 하는 것은 허무가 아니라, 가장 아름다운 순간에 있다는 것을 작가는 알고 있기 때문이겠다.
5.
언급했던 것처럼 가장 아름다운 순간은 사라지는 역설에 있기도 하다. 산호는 죽어가는 순간에 탈색된다. 수온이 오르면 산호는 몸 안의 조류를 내보내며 하얗게 변하는 것이다. 아직 죽음은 아닌, 그 직전의 단계이지만 잔혹하게도 그 순간이 가장 아름답다. 형형색색이 빠져나가고 나서야 산호의 형태가 선명해진다. 살아있을 때보다 죽어갈 때 더 뚜렷해지는 것과 같이 〈백화의 숲〉의 면천도 그 과정을 거쳤다. 작가가 의도한 색이 아니라 시간이 남긴 색이 작업이 된 것이다. 처음에 있었을 푸른 것들은 이미 없다.
〈부재의 화석〉은 이 과정을 가장 직접적으로 드러낸다. 면천에 식물 잉크와 동양화 안료를 중첩하고 닦아낸다. 남아 있는 것은 있었던 색의 흔적이다. 화석은 지금은 없는 것이 남아 있는 형태이다. 있었기 때문에 없고, 없기 때문에 남는다. 작가의 의도가 빠져나간 공백 지점에 시간의 의도가 남아 있다. 그렇게 완성된 것은 작가의 작품이면서 동시에 시간의 작품이 된다.
'인간 너머'라는 전시 제목이 이 작품들 앞에서 실제적으로 드러난다. 인간을 넘어선다는 것이 인간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인간의 시간이 유일한 기준이 아니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재료의 시간, 자연의 시간, 소멸의 시간. 서지의 작업은 그 여러 겹의 시간이 한 자리에 머무는 방식으로 존재한다.
6.
몇 겹의 시간이 흐른 뒤에도 흔적은 아름다울 수 있을까. 서지가 스스로에게 던지는 이 질문은 아마도 영원히 닫히지 않을지도 모른다. 작업을 통해 답을 구하려는 것이 아니라, 질문을 지속시키는 방식으로 작업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그것은 어쩌면 바랜 사진을 손에서 놓지 못하는 이유와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선명했을 때는 그냥 지나쳤던 것이, 흐릿해지고 나서야 비로소 무언가가 걸리는 것처럼. 그것이 무엇인지 말로 설명하기는 어렵겠지만 설명되지 않기 때문에 오래 머무르는 것은 아닐까. 서지의 작업은 이 모호한 경계에서 서성인다. 소멸이 완성한 것들, 사라지면서 남긴 것들, 거대한 것들이 무너지는 시대에 작고 하찮은 것에 집중하는 이 선택이 충분한가라는 질문은 여전히 열려 있다. 서지도 아마 여전히 그 질문을 닫지 않은 채로 오늘도 거기에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