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여기 있고, 너 거기 있지

서문어울아트센터2025. 11. 25.

1.

한국 사회에서는 무언가를 정의하기보다 먼저 감각하려 한다. 장황한 설명보다는 느낌적인 느낌을 택하고, 묘한 상황에서는 질문보다 눈치로 맥락을 읽는다. 그 대표적인 예가 '썸'이라는 단어이다. 원래는 영어 'something', 그러니까 '뭔가 있다'에 가까운 표현이었지만 한국에서 유통되는 과정 중에 변화가 생겼다. 처음에는 '썸씽이 있다' 정도로 쓰이다가 어느새 'thing'는 사라지고 남은 것은 모호한 'some'뿐이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여기에 '타다'라는 동사가 붙으면서 존재나 사물을 지시하던 말은 상태를 가리키는 표현으로 정착되었다. 다시 말해 '썸'은 관계가 무엇인지 정의하는 단어가 아니라 관계가 어디쯤에 있는지 가리키는 좌표가 된 것이다. 확정이 아니라 보류, 결론적인 정의보다 과정을 감각하려는 태도가 단어 안에 녹아있는 것이다. 어쩌면 이 단어가 가리키는 위치가 전환된 이유는 우리가 느끼는 감각이 우선하기 때문일 수 있겠다. 친구의 썸은 기가 막히게 읽혀서 여러 조언을 해주면서도, 정작 자신의 썸에 대해서는 감지조차 어렵다. 이렇게 같은 감각이더라도 위치에 따라 감각할 수 있는 능력이 달라진다. 거리가 생기면 구조가 보이고, 대상과 얽히지 않을 때 더 쉽게 해석된다. 생각해 보면 썸이나 연애뿐만 아니라 우리가 딛고 있는 이 세계 역시 대부분 그대로인데, 대상을 대하는 관점만 바뀌어도 전혀 다른 면을 드러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지나치던 일상이 몇 년 동안 아무 의미도 없었다가 어느 날 내면의 무언가를 건드리는 장면이 되는가 하면, 늘 듣던 음악이 어느 순간 묘하게 다른 감정으로 들리기도 한다. 이렇듯 변화는 대상이 아니라 감각이 놓인 자리에서 생긴다. 감각은 예민함을 높인다고 더 잘 느껴지는 것이 아니라, 위치가 달라질 때 비로소 작동한다. 그래서 감각은 종종 '능력'으로 오해된다. 더 잘 듣는 사람, 더 날카롭게 보는 사람, 더 예민한 사람처럼 말이다. 하지만 감각의 조건은 예민함이나 민감함보다 오히려 '어디에 서 있는가'에 가까운 문제이다. 가까이 있을 때 보이지 않던 것이 멀어지면 보인다거나, 당시에는 이해할 수 없던 의미가 시간이 지나 되돌아보면 또렷해지는 것도 같은 맥락일 것이다. 감각은 해석되기 이전에, 해석을 가능하게 만드는 자리에 놓여 있다. 그리고 그 자리는 고정된 위치가 아니라 끊임없이 이동한다. 의미는 어딘지 모를 곳에 존재하겠지만 의미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의미의 경계로부터 시작한다. 《Hyper-Sense: 초감각의 세계》는 바로 그 끊임없이 이동하는 감각의 자리를 따라가는 전시이다. 작가들은 감각을 확장하거나 강화하는 것이 아니라, 감각이 놓인 자리를 다시 확인하고, 그 자리의 이동이 세계를 어떻게 다시 조직하는지 살핀다.

2.

김은정은 감각을 다시 원점으로 되돌린다. 우리가 세계를 처음 마주했을 때에는 시각보다 닿음이 먼저였다. 갓 태어난 몸은 눈을 뜨기도 전에 온도와 압력, 피부에 닿는 촉감으로 세계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배우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세계는 보기 전부터 감각했고, 우리는 이해보다 접촉으로 이 세계를 학습했다. 그리고 그 닿음은 이후에도 끊임없이 이어진다. 바닥, 공기, 옷감, 이불처럼 몸에 닿는 모든 사물이 우리의 가장 오래된 기억이 된다. 김은정은 이러한 가장 오래된 감각의 기억을 둥글게 다듬어진 직물로 제시한다. 둥글게 다듬어진 형태는 손이 쥐고 누르고 감싸며 남긴 압력의 결과이다. 이 과정에는 작가의 의도만 있는 것이 아니라 재료의 저항, 중력의 방향, 직물이 버티는 힘 같은 물리적 조건이 함께 작동한다. 즉, 형태는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몸과 세계가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남긴 압력의 흔적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이 압력이 물리적 혹은 시각적 정보에 머물지는 않는다. 김은정의 작업은 만지기 전에 이미 '부드럽다', '따뜻하다', '폭신하다'와 같은 언어를 먼저 떠올리게 하는데, 이는 시각적 판단에 앞서, 이미 신체에 저장된 감각적 기억이 되살아나는 과정이라 여겨야 할 것이다. 이 작업은 만지지 않아도 이미 만져본 적 있는 감각을 떠올리게 하고, 보지 않아도 알고 있는 감각의 기억을 공간에 펼쳐놓는다.

우리가 감각의 시작점을 찾아 자리를 이동시켰다면 자연스럽게 다음과 같은 질문이 따라온다. '우리가 감각하는 세계의 신호는 어디에서부터 오는가.' 노순천은 이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 철판 위에 놓인 사물들이 진동하도록 환경을 조성한다. 그리고 그 진동은 작가가 의도적으로 '연주'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던 물리적 파동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작동된다. 때문에 그것이 락인지, 발라드인지, 트로트인지, 어떤 음악적 요소를 찾아내야 하는지는 중요한 것이 아니다. 요는 항상 흔들리고 있는 세계(존재)를 언제, 어디에서,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의 문제라는 점이다. 노순천은 자신이 만든 사물을 배치하고, 그것이 공간 속에서 울리는 시간을 기록한 뒤 다시 재생한다. 이 과정은 '재현'이나 '표현'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던 신호를 가시화하고 청각화하는 장치가 된다. 그래서 노순천의 작업은 이미지를 보여준다기보다는 사물의 미세한 움직임에 귀를 기울이도록 제안한다. 세계가 보내는 신호로부터 감각이 놓여 있는 자리를 조정하여, 듣지 못했던 것들이 들릴 수 있는 위치로 우리를 이동시키는 것이다. 감각은 들으려는 태도보다 들을 수 있는 위치로 이동하는 순간에 비로소 열리기 때문이다.

노순천이 이미 존재하던 신호를 드러냈다면, 윤지영은 그 신호가 어떻게 의미로 바뀌는지를 다시 질문한다. 감각이 우리 몸에서 즉각 반응되는 것처럼 느껴지지만, 실은 여러 감각들이 동시에 작동하고 서로 맞물리며 해석된다. 어떤 이미지를 본다고 생각하는 순간에도 우리는 소리를 듣고, 거리감을 느끼고, 표면의 질감을 상상한다. 즉, 하나의 감각이 작동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감각이 서로 번역하고 조정하며 이해에 도달하는 방식을 구성하는 것이다. 윤지영의 작업은 이 감각들의 협업을 드러낸다. 규칙처럼 보이는 반복은 운율이 되고, 배열된 형태는 음표처럼 보이며, 사물의 간격과 여백은 소리의 쉼표처럼 작동한다. 보는 행위가 어느 순간 듣는 행위로 전환되고, 다시 사유의 흐름으로 미끄러질 때 감각은 1:1로 대응하는 감각이 아니라 계속해서 방향을 바꾸며 이동하는 체계로 인식된다. 그리고 그렇게 감각이 이동하는 동안, 익숙한 것들도 다시 돌아온다. 같은 사물을 다시 보는 순간 그것은 더 이상 처음의 그것이 아니다. 반복 속에서 감각은 조금씩 조율되고, 그 조율의 간극에서 이전에 없던 의미가 피어난다. 윤지영의 작업은 바로 그 간극, 감각이 다른 감각으로 이동하며 미세하게 벌어지는 시간을 붙잡는다. 그렇다고 이미지가 변화하지 않는다. 다만 감각의 협업이 세계의 다른 얼굴을 드러내고, 우리는 그 변화에 반응하는 것이다.

감각이 번역되고 의미의 구조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낸 뒤에는 또 다른 전환이 찾아온다. 감각이 더 이상 '받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순간이다. 감각은 늘 외부 자극에서만 시작되는 것이 아니다. 때로는 몸이 먼저 움직이고, 그 움직임을 따라 감각이 뒤늦게 형성되기도 한다. 김예솔은 이 과정을 다시 추적한다. 공을 굴리고 멈추고 다시 굴리는 놀이와 같은 과정 속에서 남는 흔적은 계획이나 목적의 산물이 아닌, 움직임이 지닌 시간성과 우연성으로 구성된다. 그 흔적은 작가의 통제를 벗어나 몸과 재료, 중력, 마찰과 같은 조건들의 결과로, 감각이 능동적 판단 이전에 이미 세계와 관계하고 있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관객이 참여 가능한 구조 또한 동일한 원리를 따른다. 참여는 체험형 장치나 몰입적 경험을 유도하기 위한 목적이 아니라, 감각의 형성 과정이 고정된 방식이 아니라는 점을 보여주는 장치로 기능한다. 움직임을 수행하든, 단지 그 흔적을 바라보든, 감각은 다른 속도와 방식으로 생성된다. 중요한 것은 행위 여부가 아니라, 감각이 발생할 수 있는 조건이 열려 있다는 상태에 있다는 것이다. 때문에 작품은 감각을 어떠한 방향으로도 확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감각이 형성되는 과정에서 우연과 변수가 개입할 수 있도록 여백을 남기며, 그 과정이 어떻게 형태로 흔적될 수 있지를 방증한다.

3.

감각이란 것은 처음부터 확실하거나 명료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설명되기 어렵고, 그 어떤 문화의 언어로도 명확히 잡히지 않는다. 항상 방향을 바꾸고 자리를 옮기기 때문이다. 전시에서는 이러한 감각의 움직임을 네 작가의 작업에서 서로 다른 방식으로 드러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김은정의 작업은 감각을 가장 오래된 기억의 지점으로 돌려놓는다. 세계를 처음 만났던 방식, 다시 말해 닿음, 압력, 온도와 같은 신체적 감각이 다시 떠오르는 자리로 이동시키며 감각의 기원을 되묻는다. 이어서 노순천의 작업에서는 이미 세계가 보내고 있었지만 들리지 않았던 신호가 감각의 범위 안으로 들어온다. 감각은 여기에서 처음으로 '세계가 먼저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한다. 그리고 윤지영은 이 신호가 의미로 변환되는 과정을 남겨두고, 감각이 다른 감각의 체계를 오가는 경로를 구축한다. 보는 일과 듣는 일, 이미지와 파형, 소리와 색 사이에서 감각은 단일 채널이 아닌 번역의 구조로 작동한다. 마지막으로 김예솔은 감각을 다시 신체의 자리로 되돌려 놓는다. 감각은 외부에서 주어지는 정보가 아니라, 몸의 움직임 속에서 생성되는 하나의 과정이 된다. 이 흐름 속에서 드러나는 것은 감각의 확장이 아니라 자리의 이동이다. 더 잘 느끼는 것이 아니라, 어느 위치에 서느냐에 따라 우리가 바라보는 무언가는 전혀 다른 구조로 다가온다. '썸'이라는 단어를 다시 떠올려보면 이 전시가 다루고 있는 감각의 상태가 조금 더 선명해진다. 썸은 관계가 무엇인지 정의하는 말이 아니라, 관계가 어디쯤인지를 지시하는 말이다. 확정되지 않은 상태, 설명하기 어려운 감정, 그럼에도 분명히 존재하는 무언가와 같이 감각도 같은 맥락에 있다. 사실 우리는 세계를 정확히 인식할 수 없다. 감각하는 방식으로 이해하고, 또 그 의미가 서서히 구조화되기 때문이다. 그렇게 자리를 옮길 때 세계는 전혀 변하지 않았음에도 다시 읽힐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Hyper-Sense: 초감각의 세계》가 제시하는 방향, 그러니까 감각은 '초능력'적인 감각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던 것에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거나, 혹은 약간의 거리를 둬보는 움직임이라 할 수 있겠다. 작가들의 제안과 같이 아주 약간의 이동이나 전환만으로 우리는 세계를 다시 읽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썸은 여전히 파악하기 힘들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