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것과 이것을 더하여

평론임도2022. 11. 2.

인류사에서 인간을 지속케 했던 생존법을 이분법적으로 나눌 수 있다면, 그것은 노동과 여가일 것이다. 노동의 하위 카테고리에는 생계 및 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다양한 수단들이 있을 것이며, 여가의 카테고리 안에는 휴식이나 문화적인 활동, 나아가서는 생산적인 취미활동까지 포함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은 극단적인 구분법으로 인류의 역사를 써내간다면 그 복잡하고도 정교한 관계성을 설명할 수는 없겠지만, 어쩌면 이러한 반증을 통해 두 가지 범주 안에서 정의되지 않는 교집합적인 지점인 예술을 탐색하기에는 더욱 쉬울 수 있겠다(물론 사회의다양한 범주 안에서 교집합적인 부분은 예술 외에도 존재한다). 일견 예술은 관객에게 있어 여가의 카테고리 안에 속하지만 예술가에게 있어서는 노동의 카테고리 안에 속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실상, 예술은 예술가에게 있어 두 가지의 범주를 모두 포함하고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 예술가는 노동으로써도 여가로써도 예술을 생산하고 소비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마르셀 뒤샹(Marcel Duchamp) 이후로 예술의 한 축은 노동과는 관련 없는, 그저 아이디어의 형태만으로도 존립할 수 있게 되었다. 예술은 스스로 노동이라는 신화 위에, 고대의 플라톤이 설계한 이데아라는 도면을 펼쳐 다시 뼈대를 쌓기 시작하였다. 마침내 현대에 와서 새롭게 건축된 신화는 다양한 이야기들을 만들어내었고, 예술의 전통적 형태를 넘어 사회와 직접적인 관계를 맺는 이야기까지 풀어내게 되었다. 이제 예술은 생각(문제의식)을 가지게 되었고, 원인을 분석하고, 과정을 행했으며, 결과를 도출해내는 형태로 진화하게 되었다. 이러한 예술은 그들 스스로를 보다 넓은 사회의 영역에 위치시키고자 하였으며, 이는 노동의 영역으로 귀속시키는 형태를 채택하여 사회와 관계를 맺기를 시도하였다. 그리고 그 노력은 동시대의 한국사회에서도 만연하게 지속되고 있으며, 아직도 도전적으로 결과 도출을 요구하고 있다.

동시대의 이런 상황에도 불구하고 예술은 간과하지 않을 수 없는 지점을 지속적으로 요구한다. 바로 노동성과 더불어 공통적으로 속해있어야 할 여가적인 측면이 그것이다. 임도 작가는 작업적 맥락의 출발선상을 이 지점으로 지정하고 예술이 가져야 할 중의적 위치에서 노동성과 여가성을 함께 드러내며 이야기를 풀어내고 있다. 즉 임도 작가의 작품은 무수히 반복된 뜨개질로써 구성되는데 뜨개질이라는 것은 특별한 감각이나 재능을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만 충분하다면 단순한 반복적인 형태로도 작업을 이어갈 수 있다. 하지만 반복적 수행(遂行)은 수행(修行)의 영역에 있듯이 여가적 상태에서 시작한 그 반복적 고됨은 노동이라는 측면으로 치환된다. 이러한 임도 작가의 작업은 예술의 중의적인 위치를 끊임없이 탐색하고, 이를 통해 자신의 존재가치에 대한 증명을 시도한다.

면직물이라는 소재를 채택한 것은 뜨개질의 수행목적에 따라 가장 보편적인 소재라 선택한 것이었겠지만, 작가의 작업은 출발선상에서의 개념과 만나며 내러티브를 더욱 확장하여 명징한 방식으로 스스로의 증명을 실험하고 있다. 설명하자면, 보편적인 뜨개질 역시 그러하듯 계획에 맞춰 형태와 범위를 지정하고 종료 지점을 설정한다. 또한 그 과정에서 하나의 규칙을 설정하게 되면, 그에 맞는 패턴이 구성되게 된다. 그리고 완성된 작품은 그 형태(form)를 가지고 있지만 가변적인 성질을 지닌다. 때문에 작품의 디스플레이는 그 공간이 가지는 특성과 그에 적합한 연출을 입혀 설치된다. 그리고 이와 같은 가변적 설치방식은 혹여 같은 작품을 다른 곳에서 전시를 하더라도 새로운 내러티브를 끌어내게 된다. 이를 중의적인 측면에서 바라본다면, 전통적 예술이 중시했던 형태(form)적 속성과 현대의 예술이 추구하는 가변적 속성을 모두 포함하고자 하는 이야기로 풀이된다. 임도 작가가 오마주 한 작품들은 이에 대한 논증을 뒷받침하고 있는데, 칼 안드레(Carl Andre), 로버트 모리스(Robert Morris), 도널드 저드(Donald Judd), 다니엘 뷔렌(Daniel Buren), 루치오 폰타나(Lucio Fontana)와 같은 작가들의 작업에서 그 형식을 빌려와 뜨개질로 제작한다. 이는 미니멀리즘이 스스로의 존재가치를 증명하기 위해 사물만 남겨둔 채 제거한 여러 맥락들(역사적·문화적·형식적) 위에 다시 노동과 여가의 개념을 입히는 방식을 실험함으로써, 과거 선배 예술가들이 이야기하고자 했던 개념에 더해 임도 작가가 생각하는 예술의 개념을 뜨개질함으로써 새로운 내러티브를 엮어내고자 하는 것이다.

1960년대, 예술을 노동의 위치로 환원시키고 사회와 예술, 혹은 예술가와의 관계를 더 큰 개념에서 엮고자 시도했던 칼 안드레, 로버트 모리스와 같은 작가들의 생각은 아마 임도 작가의 작업적 지표로써 작동하고 있을 수도 있겠다. 그래서 그들이 스스로를 예술노동자라고 자처하며 극복해온 많은 것들에 대하여 오마주하는 방식으로 경의를 표하는 동시에 작가는 그것과 더불어 노동과 여가의 중의적 개념을 포함시킴으로써 동시대 사회와 예술 안에서의 위치를 확인하려 한다. 다시 말해, 작가에게 있어 이러한 측면에서의 중의적 개념은 선배들이 구축했던 맥락을 버리지 않고 자신의 작업 속에 귀속시키면서도 한편으로는 동시대에서 자신이 보았던 예술의 가능성을 지시하고 있는 것이다. 살펴본 바와 같이 임도 작가의 내러티브에는 시간과 공간(장소)적 특성에 대해 예민하게 반응하고 있고, 이를 통해 작업은 결국 공간과 사물의 관계성에 대한 이야기로 연결된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임도 작가는 ‘인간(예술가가 아닌)’이라는 요소를 시공간에 침투시키고 있다. 작가의 작업에서 드러나는 수행(遂行, 修行)적 태도는 자신을 고찰하게 하고, 그 결과물은 성취감과 자존감을 고양케 한다. 이는 회화나 조각처럼 감각이나 재능을 겸비해야 하는 것이 아닌, 누구나 할 수 있는 방식을 택한 것과 이를 수행하는 방식에서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고됨과 성취에 대한 이야기를 선배들의 내러티브와 엮음으로써 예술과 사회 그리고 개인이라는 관계적 이야기로 풀어내고 있는 것이다. 결국 작가는 그것과 이것을 더하고 엮음으로써 동시대 예술과 예술가의 역할 그리고 이들이 어디에 위치되어야 하는지를 질문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