있는 곳과 있을 곳 혹은 있는 곳에 있기

평론찰리한2017. 10. 7.

‘Who am I?’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물음은 진부하거나 식상하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누구나 살면서 스스로에게 던져보는 질문일 것이다. 그리고 보통은 루소(Rousseau, Jean Jacques 1712~1778)처럼 인간의 기원에 대한 탐구나 존재론적인 질문이 아니라, 나는 어디에 살고 있고 무슨 일을 하고 무엇을 좋아하며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정도의 사소하고 가벼운 질문들로 시작한다. 이러한 질문은 경험적인 근거들로 비교하며 규정짓는 사유로 이어진다. 그렇다면 자신을 규정지을 수 있는 요소들은 어떤 것들이 있을까? 일반적인 방식으로는 사회적인 포지션이나 관계 혹은 상황과 범주들 속에 자신을 위치시키며 자신의 존재 방식을 규정할 것이다. 

그리고 찰리한(Charlie Hahn) 또한 일반적인 방식이나 단일한 범주로 자신의 존재를 규정하려 했지만, 결코 규정지을 수 없었다. 그는 고등학교 때 미국으로 이민을 가게 되면서 이민 1.5세대로 살아가게 된다. 서류상으로는 완벽한 미국인이지만 신체적으로는 아시아계라는 이유, 즉 한국인이라는 이유로 알게 모르게 배타적인 시선을 받았고, 반면 한국에서는 미국인이라는 묘한 경계선에 위치하여 그들과 완벽히 융화할 수 없었다. 이러한 그의 입장에 대해 타인이 들었을 때 어딘가에서 들어본, 혹은 이민자들이나 유학생들의 대부분이 겪게 되는 특별하지 않은, 일반적인 경험이라고 생각될 수 있다. 하지만 개인의 경험과 감정들까지 일반화시킬 수 있는가에 대해 반문해본다면 쉽게 긍정하지는 못할 것이다. 찰리한은 이러한 다소 일반적이지만 일반적이지 않은 경험과 감정들로 작업을 풀어내고 있다.

찰리한의 작업은 이러한 상황, 즉 정체성에 대한 물음에서부터 시작된다. 그것은 곧 자신의 위치 지어짐에 대한 불안감이나 불만, 그리고 타자에 의해 자신의 정체성이 획일적으로 규정되어 지는 폭력성 등일 것이다. 때문에 그의 작업에서는 매체나 형식의 다양함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위치’나 ‘입장’이라는 공통적인 지점을 찾아볼 수 있다. 어디에도 소속되지 못하고 (혹은 소속되고 싶지 않은 태도로 인해) 경계선상에 머물러 있는 그의 입장은 여러 매체나 기법적인 면에 있어서도 경계선에 머물며 작업을 이어가고 있다.

그의 초기 작업이었던 〈Untitled Identity〉는 자신의 불안한 위치를 직접적으로 드러내었다. 영상으로 제작된 이 작품에서는 찰리한이 미국의 유명한 인사들의 연설이나 영화의 명대사 등 미국인이라면 누구나 알 법한 그러한 내용들을 연기, 립싱크하고 있다. 그리고 화면 하단에는 한글로 자막을 입혀놓았는데, 이것이 한글문법에 맞지 않는다. 보다 정확히 서술하자면 영어식 문법 구조의 순서대로 한글 자막이 여기저기 뿌려지다가 문장이 완성된다. 번역 혹은 직역을 통해 국적 없는 언어가 되어 의미는 상실되기도 하고, 다시 국적을 찾아 의미를 획득하기도 한다. 〈Untitled Identity〉는 미국과 한국이라는 간극과 그 구덩이 속에서 모호한 자신의 위치에 대한 불안함의 정체가 무엇인지 직접적으로 자각했음을 보여준다.

〈Untitled Identity〉가 정체성에 대한 ‘직접적인 물음’이라고 한다면 이후 찰리한이 보여준 작업은 ‘응시적’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의 다음 프로젝트였던 〈Stand〉라는 작업에서는 자신의 위치와 입장에 대해 자각하는 순간을 드러낸다. 〈Stand〉는 주어진 공간에서 원근법의 방식으로 정교하게 계산되어 그어진 선들로 이루어진 작품이다. 특정한 위치에 서서 바라보면 하나의 도형이 만들어지며 그 자리에서 벗어나는 순간 기하학적 구성으로 규정되었던 것들이 단지 ‘선’으로 해체된다. 이 지점에서 관객은 찰리한이 들어가고자 욕망하는 어떤 집단 혹은 형태에 대해 그 곳을 응시하는 특정한 지점과 거리를 통해서만 파악할 수 있다. 그곳에 속해 있다면 다른 곳을 응시하게 될 것이다. 찰리한은 이 모순된 상황을 관객에게 응시하게 한다. 기하학적으로 구성된 도형은 특정한 위치가 아니면 보이지 않기 때문에 어떤 특정한 위치여야만 볼 수 있다. 그리고 이 보임은 대상과의 거리를 의미한다. 또한 그 특정한 위치는 아이러니하게도 불안감의 ‘해소’나 ‘탈아’가 아니라 주체의 ‘구속’으로 이어진다. 이러한 ‘구속’은 여전히 모종의 소속 밖, 경계에 머물러 있는 그에게 문을 열어주지 않는다.

이번 전시에서 찰리한이 보여주는 작업 〈Room Beyond〉는 주어진 것에 대한 규정 가능성을 이야기한다. 일견, 단순히 〈Stand〉의 작업을 사진이라는 매체로 옮겨온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기하학적 도형 작업이 진행된 공간 혹은 아무것도 행해지지 않은 공간을 촬영하여 출력된 사진에 기하학적 도형을 다시 새겨 넣은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사진을 통해 포착된 완전한 기하학적 도형의 형태는 하나의 고정되어진 이미지가 된다. 즉, 실제 공간에서 지각될 수 있었던 파편화된 형태를 관객들은 경험할 수 없다. 이것은〈Stand〉에서 보였던 ‘특정한 위치’를 사진의 기계적 시선을 통해 규정하려 시도한 것이다. 이번에 출품된 〈Room Beyond〉에서 보이는 찰리한의 이러한 시도는 이제는 어느 정도 그만의 포지션을 찾았음을 암시한다. 그러나 인간의 정체성이 하나로 규정될 수 없듯, 찰리한의 작업도 자신의 정체성을 파악하려고 하는 의지 즉 자신이 있는 곳, 있어야 할 곳을 찾으려고 하는 시도들이다. 그리고 여전히 자신이 어떠한 것에 규정되어 질 수 있을 때를 기다리며 예술가의 태도로써 즐기고 있음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