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감의 목록

평론김문빈2026. 3. 4.

1.

하루는 대단한 사건으로 시작하지 않는다. 오히려 몹시 익숙한 것들로 채워져 있다. 책상을 바라보고 있는 의자, 널브러져 있는 리모컨, 청소 후 놓여있는 락스통 같은 것들이다. 이 익숙함은 문을 나서도 이어진다. 엘리베이터와 층을 가리키는 버튼들, 우편함과 전단지들이 그렇다. 905호의 우편함에는 하루하루 우편물이 쌓여가는데, 바로 옆 906호 우편함은 비어 있다. 우편물을 늦게 가져갔을 수도 있고, 아예 비워둔 집일 수도 있겠지만 별일 없이 지나친다. 거리를 나서더라도 이 익숙함은 끝없이 이어진다. 어제와 크게 다르지 않은 오늘이, 역시나 어제와 크게 다르지 않은 풍경으로 채워진다. 우리는 그렇게 하루를 산다.

그런데 김문빈은 조금 다르다. 아니 정확히는,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어버렸다는 표현이 더 맞을지도 모르겠다. 작가는 구태여 이상하거나 특별한 것을 찾아 나서는 것이 아니다. 그냥 일상을 살고 있는데, 사물들이 먼저 말을 걸어온다. 갖가지 말들로 포장하여 나에게 다가오려는 전단지의 문구들이 바람에 뒤집혀 하얀 뒷면만 보일 때, 어쩐지 손절한 것만 같이 냉랭하게 느껴지고, 도로 위에 남겨진 파편 앞에서는 사고가 있었겠다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하물며 매일 앉던 의자에 표정이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락스통 앞에서는 누군가 이걸 마실 수도 있겠다는 걱정이 생긴다. 905호 우편함 앞에서는 사람이 안 사는 건지, 누군가 쓰러져 있는 건 아닌지 하는 생각이 꼬리를 문다. 사물 하나마다의 서사를 김문빈은 의도치 않게 획득하고 있다. 사건을 찾아가는 것이 아닌데 가는 곳마다 사건이 일어나는 명탐정 코난처럼, 김문빈도 이상하거나 특별함을 의도하지 않았는데, 일상의 사물들이 어느 순간 사건의 단서처럼 모여든다. 실제로 사건이 있었는지 없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작가가 그렇게 느끼는 순간, 그 사물은 이미 단서가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단서들이 모여 김문빈의 화면을 채운다.

2.

코난이 사건 현장에 도착했을 때, 그는 이미 범인을 향해 나아간다. 일상에서 모였던 단서들이 하나씩 맞춰지고, 결국 진실은 언제나 하나와 같은 대사로 이어진다. 그런데 김문빈의 화면은 그 반대편에 있다. 단서는 있지만 결론이 없다. 락스통과 뒤집힌 리모컨이 놓인 책상, 사고 이후의 파편들이 흩어진 도로, 층수를 숨기기 위해 여러 버튼이 눌린 엘리베이터. 이 장면들은 무언가 일어날 것만 같은, 혹은 일어났을 것 같은 분위기를 만들어내지만, 정작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끝내 전하지 않는다. 그리고 김문빈은 설명 가능한 것과 설명되지 않는 것이 함께 남아 있는 그 상태를 서둘러 봉합하지 않는다. 단서만 쌓인 채로, 화면은 열려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이 화면 앞에 서면 묘하게 찜찜하다. 스산한 것이 무언가 일어났을 것 같은데, 무엇인지는 알 수 없는 그 느낌. 범인도 없고 서사도 없지만, 단서만으로도 충분히 불안한 것이다. 사건은 일어나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게 중요한 것은 아니다. 단서 앞에 서는 순간, 우리는 이미 그 불안 안으로 들어와 있기 때문이다.

3.

우연히 전해진 불안에는 도저히 막을 수 없는 것이 있다. 사람들이 종종 그러는 것처럼 작가도 4월 4일 4시 4분과 같이 날짜와 시간이 겹칠 때 소원을 비는 루틴이 있다. 그러나 소원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작가 또한 그것을 알고 있다. 그럼에도 다음번에 같은 숫자가 반복되면 또 빈다. 작품에서 등장하는 연등이 이러한 맥락을 담고 있다. 소원을 담아 달아두었지만 이름은 지워져 있고, 같은 모양의 연등이 끝없이 반복되며 달려 있다.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계속 비는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공포가 거기에 있는 것이다. 이것은 체념이 아니다. 체념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멈추지 못하는 것, 그 반복 자체가 하나의 구조가 된다.

그 반복의 끝에는 그제야 옅어지는 것들이 있다. 집에서 키우던 나무의 잎사귀가 떨어지고, 산화되고, 사라지는 것들이다. 작가는 그것을 바라볼 때, 사람이 생을 마감할 때 눈동자 색이나 피부가 옅어지는 것과 오버랩시킨다. 잎사귀와 사람이 겹쳐지는 순간이다. 옅어지는 잎사귀가 있고, 반쪽짜리 달이 있고, 지워진 이름들이 있다. 그것들은 저마다 소멸을 향해 가고 있다. 그런데 그 끝은 언제나 미완이다. 그리고 그 미완의 자리에서, 김문빈은 여전히 붓을 든다.

4.

먹의 현(玄)색은 수만 가지 색을 지닌다. 모든 것을 담으면 검어지듯, 먹은 색을 지운 것이 아니라 색을 모두 품은 자리에서 시작한다. 김문빈의 화면도 그렇다. 형태는 선명하게 그려지지만 맥락은 열려 있고, 사물은 또렷하지만 그 사물이 품고 있는 이야기는 끝내 밝혀지지 않는다. 모든 사건을 품은 먹색 위로 단서들이, 의문들이, 예감들이 켜켜이 쌓인다.

김문빈은 네모난 화판이 주어졌을 때, 그것에 의심을 표하지 않는다. 감정을 사물에 떠밀고, 사물을 화면 안에 가두는 것. 현실이 화면을 잠식하지 않도록, 그림은 그림으로만 남아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회피가 아니다. 막을 수 없는 것 앞에서 인간이 취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자세 중 하나다. 소원은 여전히 이루어지지 않고, 잎사귀는 여전히 옅어지고 있다. 단서는 쌓이지만 결론은 오지 않는다. 그 모든 것을 알면서도, 김문빈은 오늘도 그 화판 앞에 자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