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유된 가치 2025
서문공유된 가치 20252025. 12. 4.
2025 공유된 가치
《공유된 가치》는 ‘사람과 예술 그리고 오늘을 연구하는 미술관’이라는 시안미술관의 정체성과 방향성을 가장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프로젝트이다. 시안미술관에서 연구와 비평은 관객에게 해설을 제공하는 것을 넘어 작품이 어떤 방식으로 남고 다시 읽히는지를 결정하는 중요한 기준으로 기능해 왔다. 한 작품이 미술관에 머무르는 시간은 곧 하나의 문장이 되고, 그 문장은 이후의 전시와 기록 속에서 반복해서 문맥을 바꾸며 새로운 의미를 만든다. 이번 전시는 바로 그 시간의 축적을 다시 한 번 또렷하게 꺼내 보이려는 실천이다.
이번 전시에 참여한 작가들은 시안미술관과 오랜 기간 인연을 이어왔다. 카와타 츠요시는 2014년 레지던시 결과보고전 〈체류〉를 통해 인연을 시작했고, 2016년 별관 개인전과 2017년 〈두 번째, 작업실 2017〉 참여로 관계를 확장해 왔다. 김영섭은 2017년 〈감각의 풍경〉 참여 이후 2018년 개인전 〈ruhe bitte!-metastase〉를 통해 자신의 문제의식을 더욱 선명하게 보여주었다. 안민은 2021년 〈INVISIBLE MONUMENTS〉, 박인성은 2022년 〈집회를 벗어난 마녀들〉, 심윤은 2019년 〈form A to B〉 와 2023년 〈타불라 라사: 하얀 방〉에 참여하며, 각기 다른 형식으로 미술관의 전시 문맥에 자신들의 질문을 남겨왔다. 이 이력은 미술관이 작가들의 시간과 고민을 어떻게 함께 지나왔는지를 보여주는 흔적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인연의 축적은 이번 전시의 구조를 이해하는 데도 중요하다. 작품은 늘 특정 시기의 판단과 감각을 품고 있지만, 시간이 지나면 그 판단은 새로운 조건과 연결되며 다른 의미를 얻는다. 그래서 과거의 작업과 최근의 작업이 한 자리에 놓일 때, 우리는 ‘어떤 작품이 더 새로운가’를 묻기보다 ‘어떤 질문이 어떻게 확장했는가’를 확인할 수 있게 된다. 이번 전시는 그 질문의 과정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구성된다.
여기에는 작품의 존재 방식에 대한 미술관의 태도도 함께 담겨 있다. 일부 작업은 기증이라는 형식을 통해 미술관의 체계 안에 자리하고, 또 일부 작업은 작가의 현실적 조건과 시간의 흐름 속에서 미술관이 오랜 기간 맡아 보관해 온 형태로 남아 있다. 특히 어떤 작업은 10년이라는 기간 동안 이 공간에 머물렀고, 그 동안 작품은 전시와 비전시의 경계를 오가며 미술관 내부의 기억처럼 축적되었다. 때문에 미술관과 작가 간의 기증과 소장이라는 단어는, 작품이 머문 시간이 만들어낸 신뢰와 책임의 관계를 드러내는 것이다.
참여 작가들의 조형적 언어는 서로 다르기에 이번 전시 역시 그 차이를 억지로 한 문장으로 묶지 않는다. 대신 각각의 작업이 시안미술관의 시간 속에서 어떤 방식으로 다시 읽혀 왔는지를 보여주는 데 집중한다. 이미지의 믿음이 만들어지는 조건을 되짚는 시선, 도시와 제도가 내는 소리의 구조를 드러내는 태도, 자동차가 점유한 삶의 윤리를 현재형으로 묻는 회화, 전쟁과 같은 한 사람의 일상이 하루 안에서 겹쳐지는 감각, 기능과 역할이 형태를 결정한다는 조각적 질문은 모두 서로 다른 자리에서 출발하지만, 결국 오늘의 삶이 예술의 형식을 어떻게 볼 수 있는가라는 공통의 방향을 비춘다.
《공유된 가치》는 예술가가 시간을 맡기는 방식과, 미술관이 그 시간을 현재의 언어로 다시 정리하는 방식이 만나는 지점에서 성립한다. 작가가 남겨 둔 작품은 과거의 특정 전시에 머무르지 않고, 미술관의 연구와 전시, 기록을 통해 계속 다시 살아나는 예술이 된다. 이 전시는 그 예술들이 서로 간섭하고 이어지는 순간을 보여주며, 시안미술관이 예술가와 맺어온 관계를 미래의 읽기 방식으로 서술한다.
박인성
하루의 많은 시간이 TV나 모니터, 혹은 스마트폰의 화면 앞에서 흐르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믿는 ‘세계’는 점점 화면 속 어딘가에서 ‘진짜 세계’의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뉴스와 다큐멘터리, 유튜브와 SNS에서 쉴새없이 흘러나오는 정보들은 사건의 흔적임과 동시에 사건을 정리하고, 정의하고, 서사로 묶어내는 장치이다. 박인성의 작업은 이 지점에서 출발한다. 작가는 무엇이 찍혀 있느냐보다, 어떤 형식과 위치에서 그 장면이 사실처럼 승인되는지를 먼저 질문한다. 다시 말해, 이미지의 내용 자체가 아니라 그 이미지가 배치되는 위치, 그리고 그 위치를 규정하는 여러 조건들에 주목한다.
작가가 다루는 재료는 아날로그 사진 필름(네거티브), 피그먼트 인화지, 캔버스, 연필, 아크릴, 합성레진에 이르기까지 종류가 다양하다. 사진 필름은 보편적으로 촬영–인화–전시라는 직선적인 경로를 따라 어느 지점에 이르면 ‘완성’으로 고정되지만, 박인성의 작업 안에서 이 경로는 쉽게 확인되지 않는다. 아날로그 필름으로 촬영된 이미지는 디지털 파일로 변환되었다가 피그먼트 인화지로 다시 물질화되고, 잘려나간 조각은 캔버스 위에서 레진과 물감과 겹친다. 인화된 이미지는 다시 스캔되어 또 다른 파일이 되고, 그 파일은 다시 출력되어 새로운 평면의 기층이 된다. 하나의 화면 안으로 겹쳐 들어온 공정의 수만큼 사건과 이미지 사이의 거리는 매 단계마다 조금씩 비껴나게 되며, 박인성에게 기록 매체는 완결된 증거라기보다 덧쓰기와 지우기가 반복되는 중간 상태에 머무는 존재에 가깝게 자리 잡는다.
초기 작업에서 작가는 필름을 서사의 순서대로 재현하지 않고 잘라낸 뒤 재배열하고, 잘려나간 조각들을 다시 평면과 설치 형식으로 펼쳐놓았다. 이러한 위치 이동은 필름에 담긴 구체적인 이미지보다 프레임 사이의 간격, 퍼포레이션, 인덱스 숫자, 브랜드명 같은 주변부를 더 또렷하게 만든다. 이미지를 뒷받침하던 장치들이 전면으로 떠오르면서, 사진이 사실을 객관적이고 투명하게 보여줄 수 있다는 믿음 역시 균열을 드러낸다. 다시 말해, ‘어떤 이야기가 이미지에 담겨 있었는가’라는 질문보다는 어디가 잘려나가고 무엇이 남도록 구조가 짜여 있는지를 드러냄으로써, 시간과 공간, 프레임에 대한 의심을 다시 질문의 자리로 옮겨놓는 것이다.
시안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Stuffed Moments〉(2023)는 이러한 인식이 2차원 평면 위에서 응축된 작업이라 할 수 있다. 캔버스 위에 피그먼트 인쇄된 사진 조각을 콜라주하고, 그 위에 연필, 아크릴, 합성 레진이 여러 층으로 중첩되는 구조는 정보를 한 번 더 ‘박제된 순간’으로 고정하는 행위처럼 보인다. 다만 이 박제는 시간을 완전히 멈추려는 시도라기보다는, 이미 여러 매체를 거치며 변형된 이미지가 어느 지점에서 더 이상 흐르지 못하고 덩어리로 응축된 상태에 가깝다. 작품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잔존하는 사진 조각과 레진 층, 안쪽으로 가라앉은 흔적들이 각기 다른 시간과 서로 다른 제작 과정을 품고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그 사이에서 사진이 보증해 온 ‘사실’이라는 개념은 끝내 도달할 수 없는 지평선처럼 밀려나고, ‘Stuffed Moments’라는 제목은 멈춘 순간이라기보다 멈추지 않고서는 감당할 수 없었던 순간처럼 읽힌다.
이번에 함께 제시되는 〈Turkish Peach〉, 〈Irish Tango〉, 〈Behind the veil〉(2024) 시리즈는 이 평면 위의 실험을 더 과감한 방향으로 이어간다. 피그먼트 염료로 인쇄된 사진용지를 콜라주하고, 그 위에 아크릴과 합성 레진을 중첩하는 방식은 〈Stuffed Moments〉와 이어지지만, 작품 전체의 인상은 상당히 달라진다. 이전 작업이 사진이라는 매체의 내부와 외부 구조를 양방향적으로 해체하고 드러내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면, 이 시리즈들은 빛과 색, 표면의 두께를 전면에 세우며, 이미지가 차지하는 물리적 자리와 시각적 무게를 묻는 쪽으로 이동한다. 서로 다른 색채와 레이어의 조합을 통해, 한때 구체적인 장면이었을 이미지가 더 이상 배경을 설명하지 못하는 상태, 다시 말해 내용보다 축적된 물성이 먼저 다가오는 상태를 드러낸다.
〈The Weight of Contextlessness〉(2025) 연작은 이 질문을 입체로 확장한다. 합성 레진 덩어리 안에는 돌, 장난감 상어와 같은 이질적인 오브제, 그리고 캔버스 작업에서 떨어져 나온 잔여 조각들이 함께 갇혀 있다. 돌은 인류의 역사, 상어는 데미안 허스트를 위시한 미술의 역사, 그리고 캔버스의 잔여물은 작가의 역사라는 위치를 갖고 있었지만 작업에서는 어떤 이미지로도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채로, 말 그대로 ‘맥락을 잃은’ 물질적 존재만 남는다. 작가는 이 파편들을 다시 한 번 레진으로 봉인함으로써, 과거 작업에서 형성된 사유가 최신작에서는 새로운 사유의 재료로 환원되는 구조를 만들어낸다. 기록의 결과물이었던 조각이 더 이상 설명되지 않는 덩어리로 남고, 그 덩어리가 다시 미술관의 한 자리를 차지하게 되는 과정 자체가, 사실에 다가갈 수 없는 구간이 반복되는 구조로 드러난다.
이를 종합해 보면, 박인성의 관심은 ‘작품이 누구를 지시하고 무엇을 말하는가’라는 단일한 서사보다는, ‘우리가 무엇에 대해 믿기로 결정하는 순간은 어디에서, 어떤 형식과 위치에서 생겨나는가’라는 질문에 더 가깝다. 작가는 이 질문이 쉽게 닫히지 않도록, 이미지와 재료 사이의 긴장을 끊임없이 되감는 루프 구조 속에 가두고, 그 반복을 기록의 평면과 잔여의 덩어리라는 두 가지 형식으로 동시에 드러내고 있다.
김영섭
오늘의 도시는 눈보다 귀로 먼저 다가오는 경우가 많다. 자동차와 버스가 지나갈 때의 진동, 교차로의 경적음, 지하에서 울려 올라오는 기계 소음, 방송과 광고에서 흘러나오는 음성까지, 도시는 여러 층의 소리로 겹겹이 채워져 있다. 김영섭은 이러한 소리들을 개별적인 사건이나 배경음으로 보지 않고, 도시와 제도를 관통하는 구조의 언어로 바라본다. 그래서 작업의 초점은 어떤 소리가 들리는가(들려주는가)에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그 소리가 어떤 장치와 형식 위에서 재생될 때 권력의 목소리로 승인되는가라는 질문으로 이웃시키는 것이다. 이때 스피커와 확성기, 표준화된 종이와 책 더미와 같은 사물들은 말할 수 있는 자와 침묵해야 하는 자를 나누는 구조의 형상을 품은 오브제로 등장한다.
초기의 사운드 설치 작업들에서 김영섭은 도시 곳곳에서 수집한 소리들을 다채널 사운드로 재편집하고, 이를 여러 개의 스피커와 구조물로 구성된 설치 속에 배치했다. 도시의 소음, 방송, 공공장소의 안내 음성처럼 익숙한 소리들은 한 자리에 모이는 순간, 더 이상 우리가 알던 익숙한 배경이 아니라 특정한 질서와 리듬을 요구하는 명령으로 들린다. 소리는 장소에 따라 의미가 전환되고, 스피커의 볼륨이나 방향, 설치된 구조물의 형식에 따라 듣는 몸의 자세와 동선까지 규정한다.
시안미술관에서 7년만에 새롭게 설치된 〈ruhe bitte!〉(2025)는 이러한 문제의식이 압축된 작업이다. 긴 복도를 따라 걸어 들어가야 마주치는 이 작품에서, 관객은 벽에 걸린 그림이나 조각이 아니라 공중에 매달린 A4용지 한 장과 그 아래 놓인 스피커를 먼저 보게 된다. 종이는 천장에서 내려와 허공에 떠 있고, 스피커에서 올라오는 진동에 따라 미세하게 떨린다. 독일어 제목 ‘루어 비테(ruhe bitte)!’는 “조용히 해 주십시오”라는 예의 바른 표현이지만, 반복적으로 울려온 공공의 언어를 떠올려 보면, 이 문장은 종종 발화의 권한을 가진 쪽이 공간 전체에 요구하는 형식에 가깝다.
A4 사이즈는 학교와 회사, 기관 등 우리의 삶을 규정 짓는 제도적 형식을 가로지른다. 서류와 보고서, 결재 문서를 규격화해온 표준 단위이자, 그 위에 적힐 수많은 내용은 이미 형식에 맞추어 정리될 것을 전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ruhe bitte!〉에서 종이의 흔들림은 이 형식이 얼마나 쉽게, 얼마나 지속적으로 진동에 노출되어 있는지를 드러낸다. 인쇄되지 않은 빈 종이가 공중에 떠서 계속 떨리는 이 장면은, 형식화된 사회가 개인의 목소리를 일정한 문서의 틀 안에 넣어 정렬해온 방식을 몸으로 느끼게 한다. 긴 복도 끝에 숨어있는 듯한 공간이라는 위치는 이 인식을 더욱 또렷하게 만든다. 미술관 곳곳을 지나 내부 동선의 마지막 지점에서 작품을 마주하는 경험은, 소리와 문서의 문제가 특정 작품 내부의 이야기가 아니라, 미술관이라는 제도 전체를 둘러싼 환경과 연결되어 있음을 암시한다. 김영섭은 공중에 떠 있는 A4와 스피커의 떨림을 통해, 규격화된 형식이 개별적인 서사를 얼마나 작은 힘으로도 휘두를 수 있는지를 은유적으로 보여준다.
새롭게 제시되는 작업 〈schwer〉는 이러한 질문을 지식과 역사라는 축으로 옮겨간다. 독일어 ‘슈베어(schwer)’는 ‘무겁다’, ‘어렵다’를 동시에 품고 있는 단어로, 이 작업의 구조와 잘 겹친다. 가장 아래에는 반구 형태의 스피커가 놓이고, 그 위로 미술관이 실제로 소장하고 있는 서적이 층층이 쌓인다. 책들은 특정 이론과 작가, 전시를 지탱해온 참고문헌이자, 동시에 미술관이라는 기관이 오랫동안 축적해온 담론의 기록이다. 제목이 가리키는 ‘무거움’은 물리적 하중과 더불어, 예술을 이해하기 위해 따라야 하는 문맥과 이론의 층이 만들어내는 난해함까지 함께 불러낸다.
여기서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소리는 라디오 주파수가 잡히지 않을 때 들리는 잡음에 가깝다. 누군가의 음성이 또렷하게 전달되거나, 특정한 메시지가 전파되지 못하고, 지시할 대상을 찾지 못한채 공간을 메우는 소리만 남아 있다. 김영섭은 이 해석되지 않는 잡음을 미술관이 쌓아온 방대한 지식과 텍스트의 더미 아래에 배치함으로써, 제도와 담론의 구조가 관객을 명확하게 가리키며 말한다기 보다는 대상을 찾지 못한 채 불안정한 기반 위에 놓여 있음을 상기시킨다. 채널을 찾지 못한 소리가 책 더미의 토대가 되어 있다는 설정은, 우리가 신뢰해 온 이론과 역사 역시 완결된 합의라기보다 끊임없이 조정되고 재조율되는 상태라는 인식을 불러낸다.
〈schwer〉를 구성하는 책들이 그 장소가 실제로 보유한 도서로 이루어진다는 점도 작업의 의미를 확장한다. 이 작품은 어디에서나 동일한 모습으로 반복될 수 있는 조형물이 아니라, 특정 기관이 축적해온 아카이브의 구조를 그대로 끌어 올려 눈앞에 세우는 장치다. 라디오 잡음은 이 아카이브를 떠받치는 동시에 교란하는 배경으로 작동하며, 미술관이 쌓아온 텍스트와 이미지의 체계가 하나의 통일된 목소리가 아니라, 수많은 채널과 주파수가 뒤섞인 상태 위에 성립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이때 작품의 초점은 개별 책의 내용보다는, 그 책들이 어떤 질서로 쌓이고 어떤 소리를 바닥에 깔고 있는지, 그리고 그 위에 현재의 전시가 어떻게 서 있는지로 이동하게 된다.
김영섭의 작업은 소리와 오브제를 통해 무엇을 말하는지를 직접적으로 전달한다기 보다는 누가 어떤 형식 속에서 말할 수 있는지, 그 형식은 어떤 진동 위에서 유지되는지를 질문한다. 흔들리는 A4와 위태롭게 쌓인 책 더미는, 우리가 질서와 권위라고 믿어온 것들의 토대가 생각보다 가볍고도 무겁다는 점을 동시에 떠올리게 한다. 그리고 그 구조가 어디까지 버틸 수 있을지, 혹은 어느 순간 어떤 방향으로 기울어질지는, 이 전시를 관람하는 이들의 판단과 해석 속에서 계속 열려 있을 것이다.
카와타 츠요시
도시를 바라볼 때, 혹은 도시의 이미지를 생각할 때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초고층 빌딩의 외관이나 거대한 다리의 웅장함일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그 건축을 버티게 만드는 요소들은 대개 시야에 들어오지 않는다. 콘크리트 속에 묻힌 철근, 기둥과 기둥을 잇는 볼트, 하중을 땅으로 흘려보내는 기초가 눈에 띄지 않는 자리에서 힘의 흐름을 조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겉으로는 단단한 하나의 덩어리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서는 수많은 뼈대와 관절이 중력을 견디기 위해 서로 다른 방향으로 힘을 주고받는다. 카와타 츠요시의 작업은 바로 이 지점, 겉모습이라는 껍질을 뚫고 들어가 그 안에서 팽팽하게 작동하는 ‘힘의 질서’를 꺼내 보이는 데서 시작한다. 그에게 형태란, 그저 예쁘게 만든 겉모양이 아니라, ‘어떤 힘이 작용했기에 이런 모양이 되었는가’에 대한 구조적 응답이기 때문이다.
흔히 ‘추상(Abstract)’이라고 하면,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 뭉개버린 모호한 그림을 떠올리곤 한다. 하지만 도시의 뼈대가 건물의 진짜 모습을 결정하듯, 카와타에게 추상은 오히려 대상을 가장 명확하게 꿰뚫어 보는 엑스레이(X-ray)와 같다. 작가는 “추상은 알기 어려운 것이 아니라, 대상을 분석하는 하나의 사고방식”이라고 말한 바 있다. 복잡한 겉모습을 걷어내고, ‘이것이 어떻게 서 있는가’, ‘어디서 힘을 받고 있는가’를 따져보는 것이 그가 생각하는 추상이다. 동물의 다리뼈가 왜 휘어져 있는지, 세포가 어떻게 뭉쳐서 조직을 만드는지, 기계 부품이 어떻게 딱 맞물리는지를 관찰하며, 작가는 대상을 ‘이미지’가 아니라 힘이 지나가는 ‘통로’로 다시 그린다. 다시말해 작가는 추상을 이해하기 어려운 양식으로 보지 않고, 대상을 이루는 요소를 잘게 나누어 관계를 다시 짜보는 사고의 방식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2014년과 2017년에 시안미술관에서 선보인 다리 형상의 조각 〈구조가 형태의 표면을 결정한다〉는 이러한 태도를 가장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예라 할 수 있다. 당시 작업은 조립이 완료된 다리 형상과, 그 다리를 구성했던 여러 파츠가 하나의 구조(sprue) 안에서 함께 제시되었다. 이후 미술관 안에 오랫동안 머물러온 이 조각들은 이번 전시에서 다시 분해된 단위에 가까운 모습으로 배치된다. 부품들이 부분적으로만 조립되어 있거나 바닥에 나열된 상태로 제시되는 것이다. 마치 조립 설명서의 도해(圖解)처럼 펼쳐진 이 파츠들은 관절이 꺾이는 각도, 하중을 받는 지지대, 그리고 그 사이를 메우는 덩어리들을 개별적으로 보여준다. 완성된 결과를 보는 것이 아니라, 뼈와 살이 결합되기 직전의 과정을 드러내는 것이다. 흩어진 부품들을 눈으로 좇으며 머릿속에서 스스로 구조를 세워보게 만드는 이 배치는, 형태가 우연히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철저한 기능과 역할의 조합임을 역설적으로 증명한다.
이번에 새롭게 제시되는 〈돌기/계란과 손가락〉은 이러한 문제의식을 훨씬 작은 스케일과 일상적인 재료로 옮긴 작업이다. 깨지기 쉬운 계란껍질과 유연하게 휘어지는 가느다란 스티로폼이 주요 재료로 사용되는데, 두 재료는 물리적 성질에서 극단적으로 다르다. 단단하지만 쉽게 파열되는 껍질과, 쉽게 변형되지만 다시 원래의 형태로 돌아오려는 스티로폼 막대가 만나면서, 힘이 전달되는 관절의 자리가 조형적으로 드러난다. 제목에 등장하는 ‘손가락’은 이 구조를 실제로 만지고 느끼는 신체의 끝이자, 가장 작은 힘이 집중되는 부위로 상정된다. 계란껍질과 스티로폼, 손가락이 서로 맞닿는 자리에서 구조는 안정과 불안, 지탱과 붕괴에 대한 긴장을 동시에 품게 된다.
이 작업에서 계란은 더 이상 생명을 품은 상징적 도상으로 등장하지 않는다. 오히려 알이 부화되기 이전, 혹은 이미 깨져서 내용물이 사라진 뒤에도 남아 있는 얇은 껍질의 상태에 가까운 재료로 다루어진다. 스티로폼 막대와 결합한 계란껍질의 파편은, 서로 다른 곡률을 가진 반구들이 임시로 맞대어진 관절처럼 보인다. 한 조각이 조금만 미끄러져도 전체 균형이 무너질 듯한 이 구조는, 강한 재료와 약한 재료, 붕괴된 것과 아직 버티고 있는 것이 관절이라는 자리에서 동등하게 연결될 수 있음을 드러낸다. 카와타는 이 불안정한 접속 상태 자체를 조형의 출발점으로 삼아, 구조가 표면을 어떻게 결정하는지를 다시 질문하는 것이다.
카와타의 작업에서 중요한 점은 이러한 역학적 관계가 어느 순간 조형적 긴장과 미감으로 이어진다는 점이다. 구조를 버티게 만드는 기능만 고려한다면 훨씬 단순한 지지 형식으로도 충분했을 것이다. 그러나 작가는 구조적 필연성을 해치지 않는 범위 안에서 가장 아슬아슬하면서도 안정된 비례와 각도를 선택한다. 불필요한 장치를 최대한 덜어내고, 힘을 받아내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뼈대만 남긴 상태에서 재료의 두께와 길이, 연결 지점의 각도는 세밀하게 조율된다. 이때 형식은 설명보다 앞서, 이 구조가 왜 이런 모습으로 서 있을 수밖에 없는지를 시각적으로 설득한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카와타 츠요시의 작업은 특정한 다리 모양이나 계란의 이미지를 재현하는 작업이라기보다, 형태가 스스로의 이유를 드러내는 과정을 공간 속에 세워두는 장치에 가깝다. 작품 앞에서는 ‘무엇을 본떠 만들었는가’라는 질문보다 ‘이 구조는 어떤 방식으로 버티고 있는가’, ‘어떤 역할과 기능이 이 모양을 요구했는가’라는 질문이 먼저 떠오르게 하는 것이다. 다리 형상의 조각과 계란 껍질 구조물은 완결된 결과라기보다 균형을 조정하는 중간 상태에 놓인 형식으로 제시되고, 그 사이에서 보이지 않는 관절과 힘의 분배가 자연스럽게 드러난다. 이는 우리가 딛고 선 공간과 몸 역시 수많은 접속 부위와 보이지 않는 힘의 경로 위에서 유지되고 있다는 인식, 그리고 형태를 결정짓는 이유에 대한 사유로 이어진다.
안민
오늘의 도시는 자동차가 만들어낸 소리와 속도로 채워져 있다. 출퇴근 시간마다 도로에는 차들이 빽빽하게 정체되어 있고, 인도는 불법 주차 차량으로 점유되어 있다. 이러한 풍경이 어째서 우리의 일상으로 읽히게 되었는지를 자문하는 지점에 안민의 작업적 맥락이 위치한다. 작가는 인도 위를 점령한 차량 때문에 위협과 불쾌감을 느꼈던 경험을 계기로 자동차라는 사물이 이동 수단을 넘어 권력과 특권, 그리고 그에 상응해야 할 책임의 문제를 어떻게 드러내는지에 주목한다. 다시 말해, 어떠한 사고의 한 장면보다 자동차가 도시의 공간과 몸의 움직임을 어떤 방식으로 재단하는지를 탐색하는 것이다.
이러한 인식은 「Conscience」 연작에서 가장 선명하게 드러난다. 작가는 교통사고로 심하게 파손된 차량의 이미지를 수집하고, 이를 아크릴 보드, 패트 필름, 광고천, 캔버스 등 서로 다른 지지체 위에 흑백의 유화로 반복해 그린다. 화면에는 차체의 전체 형태가 완전히 인식되기도 전에 찢기고 접힌 금속 판, 비틀린 바퀴, 휘어진 범퍼가 먼저 눈에 들어온다. 붓이 아니라, 청소 도구나 막대와 같이 비전통적인 도구로써 그려진 선들은 정교한 묘사라기보다 충돌의 속도와 힘을 더욱 강렬하게 남긴다. 물감은 완전히 지워지지 않고 얼룩과 긁힌 자국을 남기며, 시간과 노동이 켜로 쌓인 화면은 한 번의 사건이 아니라 여러 차례 반복된 충돌이 한 자리에 겹쳐진 단면처럼 읽힌다.
안민은 이러한 이미지를 한 번의 회화로 끝내지 않고, 크기와 재료를 달리해 여러 버전으로 되감는다. 그려진 사고 차량은 광고천 위에서 실제 차체에 가까운 규모, 혹은 그보다 더 큰 규모로 확대되기도 하고, 태블릿을 이용한 디지털 드로잉으로 축소되기도 한다. 같은 사고 이미지가 서로 다른 시간과 장소, 다른 포맷으로 반복 등장하면서, 그것은 어느 특정한 한 번의 사건이라기보다 이 도시 어디에서나 발생 가능한 구조적 사고의 상징으로 변한다. ‘그때 거기서 무슨 일이 있었는가’라는 서술보다, 파손된 형상이 여러 매체를 거쳐 다시 나타날 때 ‘양심’이라는 단어가 어디까지 확장될 수 있는지를 되묻는 것이다.
여기서 재료의 차이는 현실과 가상의 조건 차이와도 맞닿아 있다. 캔버스 드로잉에서는 ‘긋기’와 ‘닦기’가 반복되지만, 물감과 잉크는 완전히 사라지지 않고 화면 어딘가에 흔적으로 남는다. 한 번의 선택은 되돌릴 수 없는 것으로 기록된다. 반면 태블릿 속 디지털 드로잉은 되돌리기와 삭제, 복제 기능을 통해 실수와 망설임을 거의 자취 없이 지워 버릴 수 있다. 안민은 이 두 매체를 선호·비선호의 문제로 나누지 않고, 각각의 시간성과 흔적의 방식을 병치한다. 지울 수 없는 현실의 충돌과, 언제든 되돌릴 수 있는 가상의 충돌이 한 작가의 손과 눈을 거쳐 같은 이미지 안에서 교차하는 장면을 구성하는 셈이다.
그러나 작업은 타자를 향한 비난으로 기울지 않는다. 작가 노트에서 안민은 자동차를 “인간이 다룰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도구 중 하나이자, 그만큼 높은 수준의 책임을 요구하는 존재”라고 말하면서도, 자신 역시 그 책임의 문제에서 자유롭지 않음을 인정한다. 불법 주차를 비판하는 입장에서 출발했지만, 곧 “당신은 얼마나 도덕적으로 살고 있는가”라는 질문이 자신에게도 돌아온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이 자기 의심의 지점에서 작업 속 ‘양심(conscience)’은 누군가를 심판하기 위한 규범이나 도덕적 우월감을 확보하기 위한 표어가 아니라, 쉽게 답할 수 없는 질문이 되는 것이다.
때문에 안민의 회화는 사고 현장을 기록하는 리얼리즘으로 읽히지 않는다. 자동차라는 물리적 도구를 통해 도시의 설계, 제도의 허용 범위, 개인의 습관이 한 지점에서 어떻게 겹치는지를 드러내는 장치로 작동한다. 파손된 차체는 욕망과 편의, 무관심이 결합된 결과이자, 그 결과가 더 이상 개인의 실수만으로 설명될 수 없음을 보여주는 도상이다. 화면 속 충돌은 이미 끝난 일이 아니라 진행 중인 과정으로 표현되며, 선과 면은 완전히 해체된 잔해가 아니라 해체되는 과정, 즉 현재적 상태로 남는다.
정리하자면, 안민의 작업은 주체와 객체, 현실과 가상이 서로 충돌하는 세계에서 어느 한쪽을 옹호하거나 비판하는 대신, 그 사이에서 발생하는 균열과 책임의 문제를 오래 붙잡아 두는 구조라고 읽을 수 있다. 파손된 차량 이미지는 ‘주체와 객체’, ‘가해자와 피해자’라는 단순한 이분법으로 환원되지 않고, 도시의 설계와 제도의 허용 범위, 개인의 선택과 습관이 한 화면 안에서 교차하는 교차점으로 제시된다. 여기에 물리적 지지체 기반의 드로잉과 디지털 드로잉이라는 서로 다른 시간성을 지닌 매체가 겹쳐지면서, 지울 수 없는 현실의 충돌과 쉽게 되감길 수 있는 가상의 충돌이 의식 속에 함께 남는다.
안민은 이 충돌의 이미지를 서로 다른 크기와 지지체, 다른 방식으로 반복적으로 그려냄으로써 질문의 방향을 사건 바깥으로 넓힌다. 작품 앞에서는 ‘누가 잘못했는가’를 가려내기보다는, ‘어디까지를 우연으로, 어디부터를 책임으로 부를 것인가’라는 질문을 마주하게 만든다. 그렇기에 양심의 위치는 특정 인물의 내면이 아니라, 자동차와 도시, 제도와 개인이 서로 스쳐 지나가며 계속해서 충돌하는 그 경계에 가까울 것이다. 안민의 작업은 이 경계, 즉 충돌의 이미지를 현재형으로 유지한 채 오늘날 우리의 양심은 어디에 위치하고 있는지를 다시 짚게 한다.
심윤
오늘을 살아가는 많은 사람에게 하루는 거대한 사건이라기보다 잘게 쪼개진 여러 종류의 피로가 이어지는 시간이다. 뉴스에서는 전쟁과 재난의 장면이 반복되고, 일상에서는 야근과 회식, 출근길 교통 체증이 이어지며, 집 안에서는 늙어가는 반려동물과 가족의 문제가 겹쳐진다. 서로 전혀 다른 영역의 사건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한 사람의 몸과 기억 속에서 동시에 존재하는 장면들이다. 심윤의 작업은 바로 이 지점, 거대 사건과 사적인 일이 한 몸 안에서 뒤엉켜 버린 상태를 바라보는 자리에서 출발한다.
심윤은 영웅 서사나 거대 담론을 앞세우기보다 영화의 한 장면, 과로에 지친 현대인의 몸짓, 늙어가는 개를 안고 있는 인물처럼 사적인 이미지들을 통해 오늘의 삶이 어떤 상태 위에 서 있는지를 탐색한다. 여기서 작가는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보다 “그 일이 어떤 관계 속에서 받아들여지는가”에 집중한다. 피에타의 구도를 차용한 작품에서 정장을 입은 인물의 팔에 안겨 있는 것은 성인 남성이 아니라 노견이다. 종교화의 엄숙한 구조를 빌린 장면이지만, 화면을 채우는 것은 반려동물 보호자이자 가장, 돌봄 주체라는 여러 역할을 동시에 떠안은 한 사람의 어깨와 품이다. 이 장면은 더 이상 종교적 구원의 상징이나 의식이 아니라, 생계와 돌봄, 애도가 한꺼번에 요구되는 오늘의 삶이 어떤 무게를 지니는지를 드러내는 사적인 장면으로 전환시킨다.
여기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 에어브러쉬라는 도구이다. 화면을 멀리서 볼 때는 인물의 자세와 표정, 구도가 또렷하게 인식되지만, 가까이 다가갈수록 경계는 부드러운 안개처럼 흐려지고 물감 입자는 미세한 안개층으로 보인다. 옷의 주름과 피부, 바닥의 그림자는 날카로운 선이 아니라 여러 겹의 분사 흔적으로 구성되어 있어, 어디까지가 몸이고 어디서부터가 배경인지 경계가 서서히 풀린다. 이는 오늘의 삶에서 역할과 감정, 사적인 시간과 사회적 역할이 명확히 나뉘지 않은 채 겹쳐 있는 상태와도 연결된다. 화면은 명료한 서사를 약속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가까이 갈수록 인물의 정체와 장면의 성격은 흐릿해지고, 한 사람의 삶이 하나의 이름으로 정의되기 어렵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Good Morning’ 연작은 하루의 시작과 끝 사이에서 몸이 어떻게 무너지고 다시 일어나는지를 보여준다. 제목은 상투적인 인사의 문장을 빌리고 있지만, 화면 속 인물들은 상쾌한 아침의 이미지와 거리가 멀다. 책상에 쓰러져 있거나, 몸을 만 채 고개를 떨군 인물의 자세, 처진 어깨는 하루라는 시간 단위가 더 이상 깔끔하게 끊어지지 않는 현실을 드러낸다. 여기서 ‘am 1:00’는 하루가 끝났는지, 아직 끝나지 않았는지 모호한 경계의 시각으로 등장한다. 이미 어제의 피로는 정리되지 않았고, 다음 날의 노동은 예고된 상태에서, 시간은 더 이상 선명한 구획이 아니라 서로 겹쳐 들어오는 층이 된다. 에어브러쉬 특유의 그라데이션은 이 애매한 시간감을 시각화한다. 인물의 윤곽은 또렷하지만, 주변의 공기와 빛은 여러 번 분사된 안개처럼 퍼져 있어, 깨어 있음과 잠, 출근 전과 퇴근 후의 경계가 희미해진 삶의 상태를 닮아 있다.
한편, 영상 작업 〈I Saw You Dancing〉에서는 전쟁 영화의 장면들이 또 다른 방식으로 불러낸다. 전쟁 영화와 다큐멘터리, 다양한 영상에서 잘라낸 몸짓과 움직임은 원래의 서사와 분리된 채 파편적인 클립으로 등장한다. 작가는 이 장면들을 반복 재생하고 되감으며 편집하여, 폭발 직전의 몸짓과 도주, 넘어짐과 일어섬이 하나의 ‘춤’처럼 보이도록 구성한다. 배경음악으로 선택된 야키다(Yaki-Da)의 팝 곡 ‘I Saw You Dancing’은 전쟁의 폭력성과 유로댄스의 가벼운 리듬을 한 프레임 안에 겹치게 한다. 살벌하고 비참한 상황에서 비롯된 몸의 움직임이 경쾌한 음악 위에서 춤처럼 읽히는 순간, 폭력과 오락, 공포와 즐거움은 서로 다른 장르라기보다 한 화면 안에서 분리되지 않는 정서로 남는다. 영상은 전쟁을 ‘소비 가능한 이미지’로 변환하는 미디어 환경을 비판하면서도, 그 이미지를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이 이미 피로와 재미 사이 어딘가에 놓여 있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이러한 작업들을 관통하는 것은 사건 자체보다 사건이 일상 속으로 스며들어 한 사람의 정서와 몸의 습관으로 축적되는 과정이다. 늙은 개를 안고 있는 인물, 새벽까지 이어지는 노동 속에서 고개를 숙인 인물들, 전쟁 영화의 몸짓을 춤으로 되감는 화면은 서로 다른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모두 “버텨야만 하는 삶”이라는 하나의 정서, 아니 생존방식으로 이어진다. 에어브러쉬로 만들어진 모호한 경계는 이 정서를 시각적 질감으로 치환한다. 화면은 멀리서 보면 하나의 분명한 장면처럼 보이지만, 가까이에서 보면 피곤, 책임, 두려움, 우스움이 서로 스며들어 어느 한 단어로 분리해낼 수 없는 상태를 이루고 있다. 전쟁 영화의 장면은 국가와 제도의 폭력을 떠올리게 하고, 야근과 과로의 장면은 노동 구조와 생계의 문제를 환기하지만, 화면 속 인물들은 특정한 이름이나 직업, 계급으로 고정되어 있지 않다. 정장을 입었지만 특정 직군으로 규정되지 않고, 피곤해 보이지만 명확한 사연은 제시되지 않는다. 이 익명성은 한편으로는 누구나 이 자리에 놓일 수 있음을 암시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개인의 서사가 사회 구조 속에서 어떻게 희미해지는지를 보여준다.
정리하자면, 심윤의 작업은 전쟁과 노동, 돌봄과 오락이 한 화면 안에서 교차하는 시대에 개인의 몸이 그 모든 것을 어떻게 감당하고 있는지를 묻는 시도라 할 수 있다. 그는 삶을 거창한 희망이나 무거운 절망의 언어로 말하기보다, 어딘가 우스우면서도 지독하게 피곤한 장면들 속에서 오늘을 서술한다. 하루를 끝내고 다시 시작해야 하는 사람들의 어깨에 남아 있는 무게와, 그 무게가 서서히 번져 나가며 경계를 흐려놓는 감각은 심윤이 포착하고 있는 현대인의 초상이다.